올 추석엔
“오빠. 우리 내일 장 보러 갈까?”
내일은 장을 봐야 모레엔 추석제수를 준비한단다. 이제는 묻지도 않고 시작을 할 모양이다. 내 집에 들어와서 세 번째 맞는 추석이니 이젠 제법 자신이 서는가보다. 좋~지. 난 힘들지 않게 명절을 보내게 될 것 같구먼. 그래도 카드는 내 주어야 어른답겠지. 마침 추석이 월요일이라 주말에 부부가 손발을 맞출 모양이다.
좀 늦은 장을 보러 나가야 물건이 싸다 한다. 대신에 좋은 물건은 모두 팔려나간 뒤일 터인데… 걱정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고는 하지 않겠다. 단지 내 생각과 다른 것뿐이다. 나는 제수가 신선해야 한다는 생각이고, 그들은 좀 저렴한 값에 제수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니까. 아무튼 요번 추석엔 저들의 의향을 쫒을 예정이다.
영감과 내 저녁밥을 챙겨 주고 나서야 집을 나선다. 늦어도 너무 늦다 싶지만, 기왕에 맡기기로 한 일이니 지켜보자. 카드를 내 주니 한 번쯤 사양을 해 봄직도 한데, 기다렸다는 듯이 며느님은 넙죽 받아 챙긴다. 장 볼 거리를 메모나 했는지 모르겠다만, 것도 믿어 보련다. 손녀 딸아이는 맡기고 가도 좋으련만 굳이 아들이 무등을 태워 나간다.
오~라. 나가서 우선은 내외가 저녁을 사 먹고 장을 보겠군. 것도 눈 감아주자. 워낙 늦게 나서더니 자정이 지나도 들어오질 않는다. ‘야들이 시방 카드로 희희낙락 신이 나는 겨?!’ 한 시가 넘어서 들어온 내외의 손이 가볍다. 어쩐 일일까. 배달을 시켰으니 내일 아침에 물건이 온단다. 하하하. 역시 신세대 부부다. 내일 아침에 장을 더 봐야 한단다. 두부며 고기 등은 날씨가 더우니 쉬기 쉬운 것들은 내일 일거리라 한다.
다음 날 아침.
“배달이요~.”
물건이 왔으니 나는 나물거리라도 다듬어야 하는데, 도통 만지지도 못하게 말린다. 다, 모두 다 제가 한단다. 언제 다 하느냐 하니 할 수 있다고만 한다. 욕심인지 아량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아기 밥도 반드시 제 손으로 먹여야 한다 할 것이니 손이 몇이나 되는고. 아이구 야~. 아직은 내가 앉아서 뭉겔 정도는 아닌데…. 그도 어렵구먼.
아침을 해 먹은 며느님이 시장을 다녀온다. 두부는 두 모를 붙여 주문만 했으니 받아 와야 한다고. 옳거니. 눈 여겨 보아 두었구먼. 제법이네. 큰 짐을 들고 올 것도 아니면서 굳이 제 신랑을 깨워서 나란히 나선다. 여지껏 그렇게 사는 아이들이었으니 오늘도 그냥 봐 주다. 잠이 덜 깬 눈을 껌뻑거리며 따라나서는 아들이 딱하다. 아니, 신기하다. 결혼 전엔 어미가 자는 아들을 깨워 일을 시키지도 않았거니와, 시켜도 저리 말없이 따라 나섰을까 의문이다.
점심밥을 먹고는 막내 딸아이가 합세를 하더란 말씀이야. 손녀 딸아이는 영감의 몫이어서, 유모차에 태워서 길 건너의 횟집 수족관 구경을 나선다. 것도 실증이 나면 큰 길 문방구의 목마를 타러 신나게 가겠지. 영감도 손녀 딸아이와 긴 시간을 보내는 게 과히 즐거운가 보다. 나도 조그만 엉덩이를 내두르며 큰 길을 헤집을 녀석이 눈에 선해서 웃음이 지는구먼.
점심의 아기 밥을 먹이는 동안 도라지 보따리와 시금치 보따리를 찾아 펼쳐놓는다. 적 거리로 두부를 재단해 달란다. 그건 못하겠단다. 반죽도 좀 해 달라 한다. 너무 되게 되면 물을 부으면 되겠지만 반죽이 너무 묽으면 낭패라 한다. 적에 얹을 다시마랑 김치도 잘라 달라 한다. 탕도 내 몫이다. 허허허. 다, 모두 다 제가 한다더니! 킥킥킥. 딸아이와 전을 부치며 조잘 조랄. 것도 이 어미 보기에 썩 좋다. 혹 이 어미 흉을 보는 건 아닐까? 슬쩍 귀를 기우려 본다.
아들은 주방에서 설거지 중이고, 올케와 시누이가 이마를 맞대고 전을 붙이며 희희낙락.
“아가씨. 나 지금 굉장히 행복해요. 호호호.”
“왜요? 추석이라 일이 많아서 지금 힘드실 텐데요.”
“어저께 오빠랑 이것도 사구요. 오늘은 어머님이 새 전기 팬을 내 주셨어요. 이거요.”
“….”
이것저것을 돌아보던 시누이가 의아스럽다는 듯이 제 올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한다.
“이것들이 언니를 그렇게 행복하게 만들었다구요?”
“예. 근데요. 어머니한테 혼날까봐 어제 내놓지 못했어요. 오늘 어머니한테 혼나면 아가씨가 좀 도와주세요.”
“오호호호. 그래요 그래. 뭐, 혼내시려구요.”
어제, 이 시어미 몰래 접이식 모기장 지붕이 달린 둥근 채반을 사다 놓은 모양이다. 접이식 지붕이 달리지는 않았지만 채반은 얼마든지 있다. 반드시 지붕이 달려야 하는 건 아니고, 개수도 넉넉하니 공연한 낭비를 한 건 사실이다. 나는 그것으로 벌써 몇 년을 버텨오는데. 그리고 전기 팬만 해도 그렇다. 쓰던 것도 아직은 쓸 만한데 말씀이야. 며느님이 아들에게 청을 넣었는지 아들이 새 것을 청해서, 옛다 그래라 선심을 썼는데.
그럼 뭐여. 이 시어미는 ‘악랄한 시어미’가 된 겨? 알뜰이 너무 지나친 겨? 아직 혼사가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과년한 딸아이도 있고, 딴살림은 언제든지 허락한다고 예고 한 아들내외에게도 머지 않아 필요할 것이고…. ‘에구~. 젊은 것들이 이 늙은 어미의 깊은 뜻을 어이 알리요’ 싶어서 씁쓸하다. 하지만 새 팬과 지붕 달린 채반에 내 며느님이 그렇게도 행복하다지 않는가. 좋아요 좋아. 그게 그렇게도 행복하다면 나도 기분이 아주, 썩 좋으네. 그래서 요번 추석은 주방에서부터 아주 행복할 것 같은 예감^^
(잠깐의 휴식에도 아기를 안는다. 어디서 저런 힘이 나누? 아기가 참견을 하고 싶은가 보다^^)
(그녀만 있으면 영감은 언제나 행복하다. 오늘은 종일 행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