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다른 세대의 이해
두 세대가 한 공간에 사는 데에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 많다. 더욱이 노년의 세대와 젊은 세대가 같은 공간에서 산다는 것에는, 우선 세대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이 있다. 다른 집은 몰라도 우리집에서는 어린 손녀 딸아이를 키우는 일에서 그렇다. 내 남편은 칠순을 넘겼고, 나는 칠순을 앞뒀다. 우리에게는 젊은 세대가 넘볼 수 없는, ‘자식을 기른 경험에 의한 노하우’가 있다. 그러나 첫 아이를 키우는 아들 내외는 인터넷을 뒤져 얻은 지식을, 최첨단의 육아법이라고 선호한다. 심지어 노년이 ‘노하우’라고 하는 육아법을 미개한 방법이라고까지 생각하는 모양이다.
다행히 노련하지는 못해도 나에게도 인터넷을 들여다보는 기술이 있다. 하여 나도 인터넷을 뒤져, ‘최첨단의 육아법’이라는 걸 좀 더듬어 보곤 하지. 나도 손자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말이다. 그런데 서로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표현상의 다름은 있어도 좀 더 높은 차원으로 본다면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예컨대, ‘진흙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그 좋은 예의 하나다. 진흙은 염증작용을 억제(抑制)하며, 피부를 재생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우리 세대는 윗세대의 전례를 전수 받아, 아이가 다치면 진흙을 상처에 바르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진흙을 찾기 어렵다. 쉽게 약국에서 소염제나 항생제의 연고를 사서 쓴다. 그 소염제나 연고가 바로 염증억제 제이고 피부재생 제인 것이다. 다른 방법이지만 결국 같은 효과를 낸다는 말이다. 지금 시대에 진흙을 바르는 이는 없다. 내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극단의 예를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골의 벽지에서 급히 약을 구하기 어렵다면, 할머니는 손자의 상처에 급한 대로 진흙이라도 발라 줄 것이다. 물론 효과도 볼 테고.
이렇듯 내 세대와 젊은 세대의 사이에는, 분명하지만 보이지 않는 두꺼운 벽이 있다. 내가 경험한 확실한 방법도, 젊은 세대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손자를 사이에 두고 곧잘 이견(異見)이 생기곤 한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고, ‘경험보다 나은 선생은 없다’질 않는가. 그래서 내 세대는 젊은 세대의 이견이 딱하고, 내 의견을 따라주지 않는 게 야속하기 마련이다.
나는 원래 부족한 사람이라서 ‘이래야 한다.’는 식의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내 주재에 무슨…. 그저 시방 내 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읽어서 좋고 보기에 좋고 듣기 좋게 사실성 있는 글을 쓴다. 내 생활이 다른 이들이 보기에 좋고 좋고 또 좋기만 한 일일 수는 없겠다. 세대의 이야기를 너무 감정적으로 적나라하게 글을 쓰면 언제나 상처를 받는 쪽은 나다. 하여, ‘나는 이렇게 산다’고 제시만하고, 읽는 이들이 그 글 속에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터득하고 깨우치기를 희망하고 기대한다.
실제로 세대의 문제를 중심에 두고,
“젊은 세대가 조금은… 이러면 어떨까?”하는 문제를 아주 조심스럽게 제안을 했다가, 예상치도 못한 댓글을 줄줄이 받고는 스스로 고개를 숙였던 일이 있다. 차마 나도 그 댓글에 답글 달기를 포기하고 말았구먼. 답글을 주고받는 중에 더한 상처를 주고받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병을 얻기 전에 나는 복지관으로 강의를 나가는 교양강좌의 강사였다. 주로, ‘노인세대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명한 방법’에 대해서 역설을 했다. 내용은 구세대를 버리고 신세대를 따르라는 게 주제(主題)였다. 현시대(現時代)를 현명하게 사는 방법은, 신세대를 따르고 맞춰나가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요즘에야 깊게 깨달아 가는 중이다. 그때에는 아마 내가 며느리의 입장이어서 쉽게 말할 수 있었나 보다. 그러나 지금도 내가 제시한 그 방법이, 쉽지는 않아도 오답(誤答)은 아니었다고 자부한다.
지금도 강의를 원해서 전화를 걸어오는 곳이 더러 있다. 그래서 성대수술을 하고 강의를 준비했으나, 성대수술의 결과가 신통치 않아서 선뜻 나서지를 못한다. 남편은 다시 한 번 더 수술을 해보자고 제안하지만, 내가 더는 싫다. 고성(高聲)을 내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대화가 영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음성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게 흠이긴 하지만 수술을 더 시도한다는 게 자꾸만 사치(奢侈)다 싶다. 식구들에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식구들은 오히려 내 체력을 걱정하기도 한다.
만약 마이크라도 들고 다시 출강(出講)을 하게 된다면, 나는 다시 노년의 세대가 젊은 세대의 사는 법을 따라야 한다고 역설할 것이다. 그들의 살아가는 방법이 우리 세대와는 아주 다르다 하더라도, 확실하고 분명한 건 그들의 살아가는 방법이 쉽고 빠르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젊은 세대를 따르는 게 식상(食傷)한 일이라고, 쉽고 빠른 길을 두고 굳이 어렵고 느린 방법을 고집하는 건 미련한 짓이니까. 쉬운 말로, ‘새 세대의 삶은 새 부대에 담게 하라’는 게지. 구세대를 답습하라는 건 퇴보를 강요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에게도 할 말은 있다. 좀 느긋한 마음으로 노년의 세대에 이해(理解)를 구하라는 말이다. 무조건 지금의 시대에 사니까 지금의 세대에 맞추라는 건 모순(矛盾)이다. 좀 더 넓은 마음으로 포용력을 가지고, 노년의 세대가 변(變)하기를 기다려 달라는 게지. 무슨 일에서든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쉽게 적응하지만, 습관된 걸 바꾸는 건 더 어려운 법이니까. 나는 지금 이글을 쓰면서, “맞는 말입니다.”하는 댓글보다는, “너나 잘 하셔요.”하는 댓글이 올라 올 것이라는 생각에 조심스럽다. 그러나 나는 웃으며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나는 만석(晩石)이걸랑 ㅎㅎㅎ.
(우리집의 두 세대를 아우르는 통이 큰 녀석입니다요 ㅋ~. 할머니가 만들어 준 원피스를 입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