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 척 좀 해도 좋은데
제 방에서 네 날개를 펴고 자도, 안방의 시어미가 없느니만 못 하겠다 싶어서, 아래층의 작업실로 몸을 피한 지 오래다. 마침 작업실이 소방도로를 끼고 있어서 동네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한다. 맞춤 양장이 사향 길에 들면서, 단골손님들을 끌고 우리 집 아래층으로 옮겼던 터다. 제법 짭짤한 벌이가 되어서 그렇게 7년여를 운영했다. 나가는 가게 세도 없고 해서 좋더니, 이젠 내 놀이터가 된 셈이다.
누구의 덕이겠는가. 시부모님의 은덕 중에 가장 고맙고 감사한 부분이다. 내 말년을 외롭게 보내지 말라고, 여기저기(시골의 텃밭도) 놀이터를 만들어 주셨으니 내 복이기도 하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빈대떡을 부쳐 들고 오는 이가 있는가 하면, 더운 날씨에는 콩국수를 들고 들어서는 이들도 있다. 나는 작은 냉장고에 항시 시원한 음료와 과일을 준비한다.
사실은 며느리를 위해서 작업실 문을 열었다. 아니지. 나를 위해서도 되겠지만, 내 마음은 며느리를 위해서가 우선이었다. 한 집안에 시어미와 며느리가 24시간 지내는 건 나보다도 며느리에게 고역이다 싶던 차. 남편이 먼저 제안을 했다.
“매일 그렇게 누웠지 말고 아래층 문을 열고 놀지. 동네 아주머니들도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그러구 있다가 수선이라도 들어오면 용돈도 벌어 쓰고?!”
요런 요런 밴댕이 속알딱머리하고는. 남편의 성난 얼굴이 무서웠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의도였는데, 나는 왜 그리 반응을 했을꼬. 그 뒤로 남편은 작업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나도 그게 좋겠다 싶었다. 며칠 뒤 남편에게 넌지시 말했다.
“아래층에 내려가서 노는 게 좋겠는데 그 먼지를…. 청소를 어쩌나?”
아래층은 내가 대학에 입학하며 문을 닫은 채니, 햇수로 꼭 10년째다. 먼지가 얼마나 쌓였을꼬. 그 청소를 걱정했던 게다. 한심하다는 듯이 한참 나를 내려다보던 남편이 말없이 돌아섰다. 그 뿐이었다. 나도 잊고 있었다.
며칠 뒤, 주일에 교회를 다녀오니 남편이 작업실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바닥까지 걸레질을 한 모양이었다.
“아들 좀 부르지이~.”
대답이 없다. 하던 일을 마저 끝내겠다며 늦은 점심을 먹었다.
“작은 냉장고 아래층에 내려다 놔라.”
영감이 아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래서 10년 비어놓은 양장점이 내 놀이방이 되었다. 물론 천이며 재봉틀이며 모든 집기는 그대로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시간에는 있는 천으로 우리 집 여자들 옷을 만든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지만 것도 솔찮은 벌이가 된다는 걸 알아가는 중이다. 큰딸과 작은 딸, 큰며느리에 작은며느리의 옷에, 내키면 세 손녀아이들의 꼬까도 지어 입힌다. 내 솜씨가 48년을 익힌 녹 익은 솜씨라서, 백화점의 그것들과는 소재와 바느질이 과히 비교할 바가 못 된다는 데에 그녀들의 환성을 받는다. 아이들은 특히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디자인의 옷을 입어서 좋단다. 나는 좋아하는 그녀들을 보면서 행복하다.
(손녀딸을 위한 최근의 여름작품) (며느리가 시어미를 위해 준비한 오늘의 간식. 유통기
간을 적은 쪽지가...^^)
그런데 다 좋은 일인 줄 알았더니, 이게 내 며느리에게 ‘일거리’가 된다는 말씀이야. 시장에 다녀오는 길에도 음료수를 들고 들어오고 간식이라며 떡을 들고 들어오기도 한다. 집에 과일이 있는 날은 과일을 손질해서 내어오기도 하고 감자가 있는 날은 감자를 쪄서…. 아기를 한쪽 팔에 안고 쟁반을 받쳐 들고 내려오면 나도 모르게 에구구~ 소리가 나온다. 좀 모르는 척해도 흉은 아닌데 말씀이야. 휴~. 이래저래 시어미는 골칫거리다. 적어도 며느리들에게는 말씀이야. 특히 우리 집에는. 그러니 어쩌겠어. 나가 살라 해도 마다하고, 아래층은 잊고 살라 해도 말을 안 들으니. 아~. 알았다. 오래 살아봐야 아이들에게 폐만 된다더니…. 그저 오래오래 살고만 싶던 내가 요새 깊은 철학을 하는 중이다. 오래 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