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고 팔딱 뛰것슈~
옛날 어른들의 말씀에,
“손주는 내 새끼보다 더 예쁘다.”고 하셨다. 듣는 족족 내 가슴은, ‘설마~’를 되뇌었었다. 며느리 듣기에 좋아 하라는 소리겠지. 아무려면 내 속으로 낳은 새끼보다 예쁠까 싶었다. 시어머님이 시방 내 마음을 읽으신다면, ‘거 보라지.’하시겠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요런 사람이 내 집에 왔을꼬. 아마 하얀 날개를 달고 나풀나풀……. 이 집 저 집 기웃기웃하다가 내 집 대문을 들어섰을 겨. 우리 집의 빨강색 지붕이 유난히도 선명해서 찾아들었을지도 모르지. 이 나이에 좀은 유치찬란한 표현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지금으로는 어째 볼 도리가 없질 않은가.
춘향전(春香傳)의 ‘사랑가’도 아닐진대, ‘이리 오나라 업고 놀자.’하기도 우습고, ‘뒤를 돌 아라 뒤태를 보자.’하기도 마땅치 않다.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기는 영감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가장 귀한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가 몇 밤을 밝힌다. 드디어 여러 날 만에 찾아낸 이름이 ‘옥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와 같은 그런 곱고 보배로운 이름이란다. 옥(玉)이 부딪치는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그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달리 표현할 방법은 없다. 막연히 그저 청아하고 고운 소리 이겠구나 하는 감은 있다. 그도 보배로운 옥이라지 않는가. 옥이 부딪치는 소리 중에서도 최대의 보배로운 소리. 영감은 동원할 수 있는 귀한 어귀를 다 담고 싶은가 보다. 어찌 그렇지 않겠어. 70살도 훨씬 넘어서 얻은 손자인 것을. 글쎄다. 워낙 말이 없는 위인이라 여아(女兒)라는 게 마음속으로는 좀 서운했는지는 나도 알 도리는 없지. 아냐. 밤을 밝히며 이름을 찾는 걸 보면 것도 아닌 게야.
삶은 달걀을 벗겨놓은 듯한 저 맑고 고운 피부며 꼭 다문 입술과 적당히 솟은 오똑한 코. 그 예쁜 입을, 그리고 그 앙증맞은 코 구멍을 발랑거리며 꿈길을 여행 하는 아이. 입만큼이나 큰 두 눈을 가끔은 두리번거리며 세상을 읽을 준비를 한다. 또 포르스름한 청정 바다에 박힌 저 새까만 눈동자는 어떻고. 나는 시방 차마 일찍이 시인이 되어 있지 못한 것을 원망해 본다. 그저, ‘미치고 팔딱 뛸 만큼 예쁜 아이’쯤 으로 해 두자. 이 아이, ‘보배로운 옥이 부딪치는 소리 같은 보배로운 아이’로 자라라는 할아버지의 심오(深奧)한 뜻이 담긴 이름이 지어졌다. 이름 하여 ‘보(寶) 림(琳)’이란다.
우선은 글이 주는 어감이 부드러워서 좋다. 그리고 흔하지 않아서 더 좋다. 그리고 어딘가 귀(貴)티가 나서 더 더욱 좋다. 아~! 이제야 보인다. 꼭 깨물어주고 싶은 아기의 볼타구니에서, 그리고 살짝 살짝 들어나는 보조개 속에서 이 할미는 이미 ‘보림(寶琳)’의 향내가 맡을 수 있었던 것을. 잔잔한 호수 가에 엷게 피어나는 물안개 같은 신비로움과 대나무 숲 속의 잔잔한 바람이 스치는 평화스러움이 읽힌다. 분명히 읽힌다. 좋~다. 참 좋다. ‘미치고 팔딱 뛸 만큼 예쁜 내 손주’에게 안성맞춤이다. 호수 가의 물안개와 대나무 숲의 바람이 만들어낸 신비롭고 평화로운 이름. 보림(寶琳)이 좋다. “보림아~!”
어이~ 며느님!
그래도 말씀이야. 시어미 앞에서,
“요건 누구 작품이야?”
“요건 누가 만들었을꼬?”하는 건, 듣기에 좀 거시기 했다. 쩝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