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는 사라지고.
연 오일 째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며 저는 생각이 많습니다.
소녀 적 감상에 젖어 눈밭을 뒹구는 도문리 오권사님과,
교회마당에서 사진기 들이대며 깔깔 넘어지던 박집사님이 떠올라 잠시 웃습니다.
이곳 속초에서 오래 살다보니 사람들도 자연환경의 일부라는 것을 배웁니다.
바람 부는 날엔 그 방향에 몸을 맡기고, 오늘처럼 눈이 퍼붓게 되면 또 그렇게 순응하며 맞이하게 되지요.
발을 옮기기 힘들 정도로 쌓인 폭설에도 전혀 짜증 없이 맘의 여유를 갖는 사람들입니다.
눈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상념의 잔가지들이 더욱 미세하게 퍼지는 걸 느낍니다.
손으로 만져보면 차갑기만 한 결정체인데도, 내린 풍경은 참으로 포근하기만 한 것이 설경입니다.
누구네 마당이든, 담장 안이든 간에 가리지 않고 고루 공평하게 내립니다.
부요한 자의 집안에만, 권력자의 대리석 계단에만 구분지어 내리지 않고, 빈곤한 마을에도 아픈 이들의 작은 마당에도 똑같이 내려앉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이와 같을 것이기에 더욱 감사히 바라봅니다.
(앞집과의 경계인 담이 사라졌습니다^^)
오늘 아침, 눈뜨자마자 마당을 내려다보니 앞집 담벼락과의 경계가 사라지고 없네요.
막힌 담을 헐어버리시고, 모든 영혼을 사랑하신 그 분의 기운이 뜨겁게 다가옵니다.
‘경계’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엉성한 잣대입니다.
어떠한 기준을 두고 구분 짓게 된 것인지요.
애초에 하나님은 우리를 차별하여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침에 대문 앞에 나가서 찰칵! 제 차가 묻혀버렸네요..ㅠㅠ)
눈 속에 갇혀 며칠째 갑갑해지는 게 마땅한데,
저는 오히려 커다란 해방감을 얻습니다.
차량통행이 제한되고 근처 마트 가는 일도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쌓여가는 눈 때문에 대문을 여는 일도 힘듭니다.
처음으로 ‘고립’이라는 단어를 깊이 떠올려보았지요.
농담 삼아 친정동생들에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누이가 눈 속에 고립되어 간다. 헬기로 구호물자 좀 보내라!’
기본적인 반찬으로 식사 해결하고,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음식들을 녹여 먹습니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들이 똘똘 뭉칩니다.
라면 한 그릇에도 포만감이 생기고 옹기종기 모여 앉는 기회가 늘어갑니다.
작은 것만 생겨도 나눠먹으려 합니다.
비로소 소중한 사람들이 곁에 보입니다.
나이 먹어도 어리석기만 했던 제가 이번 눈 속에 깨닫는 것이 참 많습니다.
입춘이 지났음에도 푸짐하게 내리는 걸 보면 서설(瑞雪)이 맞습니다.
곧 좋은 일들이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깁니다.
휴교령이 내려 온종일 뒹굴거리는 아들과 점심끼니는 또 무엇으로 해결해야 할지요.
냉동실을 뒤져봅니다.
설날에 시어머니께서 주신 만두와 친정어머니표 여주쌀떡이 가득하네요.
벌써부터 입안에 군침이 돕니다.
내리며 쌓이는 눈만큼 우리네 사랑무게도 눈금을 더해 가리라 믿어봅니다.
떡만둣국 육수 준비하러 일어나야겠네요.
2014년 2월 10일
멈추지 않고 퍼붓는 눈을 바라보며.
*늦었지만, 제 글방을 찾는 분들께 새해 인사 올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