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툇마루


BY 박예천 2014-01-06

                         

                         툇마루

 

 

 

남편의 대학동기가 산세 좋은 곳에 새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오랜 아파트생활을 접고 꿈에도 그리던 전원주택에 살게 된 것이다. 일간 다녀가라기에 우리가족 넷이서 동행을 했다.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입구에 다다르자 소울음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골목마다 두엄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딸아이는 코를 틀어쥐고 인상까지 찡그린다. 이런 악취는 처음이라며 입술이 쉴 새 없이 종알댄다.

대문 없는 마당 안으로 들어서니 디귿자형 단층주택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앞뜰 중앙 우물가엔 돌확이 놓여있고 배롱나무 한그루가 정겹게 서있다. 주인 내외가 발품 팔아가며 전국의 주거형태나 정보를 수집했다더니 과연 공들인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집안구경을 하느라 남편과 아이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돌아다닌다. 전문 목공예작가가 만들었다는 방안의 가구나 주방 찬장들도 보통솜씨가 아니다. 장식장이며 벽면까지 온통 나무냄새다. 거실에 빼곡하게 꽂힌 엘피판과 명품관에서나 볼 수 있는 전축도 입이 벌어지게 한다. 우리 재정형편으론 엄두도 내지 못할 집구조이다. 신분의 격차가 있는 시대였다면, 의당 이집은 양반 댁이요 나는 평민수준이었을 것이다.

 

주변경관을 살펴볼 겸 뜨락으로 나왔다. 그 때 내 눈을 확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툇마루였다. 무심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는 건물 아랫부분의 테두리장식인가 했었다. 아직 나뭇결이 다듬어지지 않고 칠도 하지 않아 거칠 뿐이지 그건 분명 툇마루다. 안주인에게 물어보니 예전 한옥을 떠올리며 일부러 계획하여 만든 것이란다.

나는 여태껏 누구네 집 물건이나 옷가지를 욕심내본 적이 없다. 샘이 나서 당장 장만하겠다며 헛물을 켜지도 않았었다. 헌데, 그 집 툇마루를 보고 집으로 돌아온 날부터 끙끙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번쩍거렸던 주방그릇과 가전제품들도, 따로 마련된 고급스러운 서재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득한 일이겠지만 우리도 허름한 집이나마 짓게 된다면 꼭 툇마루부터 만들자고 남편을 졸라댔다.

 

햇볕 쏟아지던 어느 계절 오후.

배 깔고 엎드려 숙제한답시고 연필심 꾹꾹 누르다가 낮잠에 빠져 졸던 그 유년의 툇마루가 지금 내 집에 들어앉는 욕심을 부려본다. 침 흘리며 졸다가 저녁어스름 눈을 뜨면 한쪽 볼에 새겨진 마루 결 자국을 보시고는 배꼽 잡던 어머니.

논일 밭일 모두 나간 빈 집에 혼자 남아있는 반공일 오후, 툇마루가 유일한 벗이었다. 길게 이어진 마루 틈엔 개미일가가 행렬을 시작하고 이따금 뚫린 나무옹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심심찮게 본다. 심통이 나면 손톱으로 눌러 죽였던 만행을 서슴지 않았노라 이제야 고백한다.

동전만한 구멍을 들여다보면, 잃어버렸다가 찾지 못했던 아우의 신발짝이 나뒹굴기도 하고 흙먼지와 범벅된 숟가락 한 개가 보이기도 한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았던 공간이다. 스르르 졸면서도 코끝에 스미는 나무냄새로 인해 편안해 지곤 하였다.

세상은 빠르고 간편하게 변화해 가는데, 나만 점점 퇴화되는가보다. 기능이 최첨단이라는 신식 기계들이 쏟아져 나오건만 나는 그것들과 여태 친해지지 못하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도시문명들이 내 지르는 괴성들에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남편 지인의 집에 뺑 돌아가며 붙은 툇마루를 보고 온 후, 나는 거의 끙끙 앓을 정도가 되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필사적인 그리움이기도 했다. 떠난 사람들과 소멸되어진 공간들이 툇마루만 있다면 모두 되살아나 나를 품어줄 것만 같은 묘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단지 창호지 한 겹 문살에 발라 금 긋듯 안과 밖의 경계를 삼고, 방문 앞에 이어붙인 툇마루는 그 집 주인이 가진 또 하나의 여유였다. 대청마루로 향하는 통로역할도 했겠지만, 지나던 나그네가 슬쩍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을 수 있는 배려의 공간이기도 하다. 메마르고 각박해진 요즘 사람들의 기억 속엔, 오래 전 간직되었던 툇마루조자 버썩하게 말라 쪼개지고 없을 것이다.

 

결국 조급증에 참지 못한 나는 작은 반란을 시도하고 말았다. 몇 년 동안 안방에서 사용해오던 나무받침 대형침대를 매트리스만 남긴 채 분리하기로 했다. 덩치 때문에 방안이 비좁아져 골칫거리였던 침대다. 대형폐기물로 버리자던 남편을 만류하고 마당에 내려놓았다. 둘이서 옮기는데 여간 벅찬 일이 아니었다. 먼지 닦아내고 니스 칠을 몇 겹 했더니 제법 매끈해졌다. 장정들의 힘이 필요한 무게였는데, 때마침 친정동생들이 놀러왔기에 2층서재로 올려 달라 부탁했다. 진땀 흘리며 계단을 오르내리고 마침내 나만의 툇마루가 놓여졌다. 실은 마루라는 이름보다 평상 두 개를 합친 모양새다. 탁 트인 베란다 앞에 어설프게나마 툇마루가 생겼다.

 

이른 아침이든, 해질녘이든 그 마루에 앉으면 부는 바람결에 온갖 것들이 다 묻어나온다. 벌렁 누워 하늘을 쳐다보노라면, 회상에만 머물러 있던 것들도 전부 찾아온다. 물컹거리는 할머니 젖무덤이 되살아나고 꼴지게바소쿠리 꼭대기마다 산열매 걸었다가 내밀던 할아버지 목소리도 들린다. 이제껏 귀 열어도 들리지 않았던 새소리가 들리고 힘찬 날갯짓까지 보인다. 그 어릴 적 툇마루에서 통통하게 생각의 살이 오르고 감성의 곁가지가 늘어가던 공간속으로 시시때때 돌아간다.

 

2층에 내방이 생겼던 때도, 널따란 밭뙈기 장만했던 날에도 느껴보지 못한 벅찬 기운이 포실하게 속을 채워온다. 드넓은 세상 귀퉁이에 낡은 툇마루 한쪽 놓았을 뿐인데, 누구도 가져보지 못한 것을 지닌 양 맘이 부요(富饒)해진다.

저만치 설악에서 불어왔을, 때 이른 바람 한 타래가 넘실대며 내 작은 툇마루 귀퉁이를 감히 넘보고 있다.

주인아낙 인심으로 잠시 쉬어가라 청해볼까 한다.

 

 

2013년 수필세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