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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랫줄과 감꽃


BY 박예천 2013-06-04

 

빨랫줄과 감꽃

 

 

 

 

 

 

빨랫줄 수명이 다해가고 있다.

마당가운데 두 개의 줄이 있는데, 이사 오면서 매어 놓은 먼저 것이 낡았다.

높은 자리에서 팽팽한 가로줄을 자랑하더니 언제부터인가 점점 늘어진다.

또 다른 늙음을 바라보듯 젖은 빨랫감을 얹을 때마다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나온다.

매끈했던 것이 까슬까슬 일어나 햇볕에 잘 마른 빨래 표면은 이따금 마른 나일론 가루가 묻기도 한다.

“이것 좀 새 것으로 바꿔 주라!”

계단 난간에서 담배연기 뿜어대는 남편을 향해 퉁퉁 거려본다.

“알았어!”

이 대답을 들은 지 한 달이 넘었고, 곧 두어 달로 접어들었을까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부부로 살면서 내가 터득한 지혜라고하면, 채근하지 않는 것이다.

잔소리로 재촉하거나 투덜거리며 쏘는 말투가 오히려 일의 출발에서 멀어지게 하는 걸 종종 봐왔기 때문이다.

몇 번 부탁해서 시행되지 않으면 그냥 포기해버린다. 후에 불편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어 수습의 범위가 더 커지더라도 나는 그편을 택하고 만다.

굳이 쨍그랑 거리고 싶지 않다는 게 내가 살아남기(?)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오늘도 그 빨랫줄 앞에서 나는 오만상을 찡그린다.

싹둑 잘라버리고 어설프게라도 내가 일을 벌여볼까 하다가 조금 더 두고 보자 한다.

옷걸이에 걸어가며 살구나무에서부터 하나 둘씩 감나무방향 오른쪽으로 가고 있는데, 빨랫줄보다 더 연로하신 감나무가 제 몸 기댈 곳이 없었는지 팔 하나를 축 늘이고 있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낡은 빨랫줄에 싱싱하게 물오른 초록 가지를 얹었다.

상반되는 묘한 대비를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푸석푸석 껍데기가 벗겨져 곧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고 버티는 안간힘위에, 떡하니 혈기왕성한 팔뚝을 걸치고 있다니.

대단한 철면피이거나 배짱이다.

아니, 천지를 모르는 순진무구의 어린아이 심성이겠구나.

참기름 바른 것 마냥 반질거리는 잎사귀만으로도 생명력이 넘치건만, 앙증맞은 감꽃까지 피어 합세를 했다.

올망졸망 매달려 입을 열고 재잘거리는 것이다.

휘늘어진 가지를 빨랫줄 악보에 걸치고 감꽃들은 제각기 음표가 되어 통통 튀어 오른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숨 넘어 갈 듯 깔깔거리며 웃다가 간지러워 못 참겠는지 땅바닥을 뒹굴기도 한다.

 

바구니 속 빨랫감 꺼내다 우뚝 서서 그 꼴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본다.

저놈이 그놈이구나.

감꽃만 피면 울컥 설움 한 덩어리가 가슴에서 먼저 피어나곤 하더니, 꽃잎위에 아들의 입술이 보인다.

녀석이 다섯 살 이었던가. 감각치료실 나들이 때 처음으로 만났던 감꽃.

늙은 어미 빨랫줄에 싱싱한 내 아들은 아직도 팔 뿐만이 아니라 온 몸 전부를 통째 올려놓고 산다.

감꽃은 때마다 피어 재잘거리는데, 내 아들의 입술은 십 오년의 봄이 바뀌어도 피어날 줄 모른다.

언제고 저 줄은 명이 다해 끊어지고 말텐데.....,

 

나는 일부러 늙은 빨랫줄에 많은 옷걸이를 걸지 않는다.

바로 옆, 얼마 전 매어놓은 단단하고 매끈한 줄에만 주렁주렁 짐을 올리는 편이다.

염치없이 기댄 감나무 한 팔이지만, 넘치게 힘겨울 것이라 생각되어서이다.

아들 하나만으로도 뻑적지근한 내 삶과 다를 것이 없는 그림이다.

 

퇴근한 남편 눈치를 보다가 툭하니 한마디 건네 본다.

“자갸! 빨랫줄 새 걸로 매 줄 거지?”

“어...., 기다려. 올해 감 다 익고 떨어지면 가지치기 하면서 다시 걸어줄게!”

콧소리 맹맹 거리면서 찔러봤으나 결국 한 해를 넘겨야 될 일이다.

 

감꽃이 지고나면 주렁주렁 열매들을 매달고 또 다른 무게로 빨랫줄에 올라앉겠지.

몇 번의 계절 견뎌내며 고단하고 나른한 수평이나마 유지해갈 늙은 줄에게 위로를 보낸다.

‘너도 나처럼 쉬고 싶겠구나!’

속말을 하면서.

 

 

 

2013년 6월 4일

빨랫줄에 얹혀 피어난 감꽃을 보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