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미성년자 자녀에게 식당에서 술을 권하는 부모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053

꿈이 피어나는 봄


BY 박예천 2013-02-28

꿈이 피어나는 봄

 

 

 

 

별무더기가 밤하늘 가득 낮게 내려앉았다.

저녁설거지 끝내고 감자껍데기를 두엄자리에 버리러 나갔다가, 쉽게 들어오질 못하고 있다.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 와서 맞이하는 네 번째 봄이다.

살구나무 아래 흙 틈 비집고 수선화 싹이 근질거리는 머리통을 내민다. 담장 안 구석구석 스며있을 봄기운 느껴보느라 지그시 눈감아본다.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는 호흡에도 봄의 결정체들이 건더기로 따라 들어간다. 생각 같아선 어금니로 어적어적 씹어 삼키고만 싶다.

벌써 봄이로구나.

계절의 변화에 유독 민감했던 내가 올해는 무엇에 쫓기느라 그랬는지 시간을 잊고 살았다. 다른 지역에 비해 눈 소식이 뜸했던 터라 아직도 겨울인가 했다. 낮 동안 쏟아지던 햇살의 깊이가 전과 다르다는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저 꽃피웠다 떨구는 실내 화분들만 뚫어져라 쳐다봤을 뿐이다.

 

오늘에서야 봄을 만난다. 손바닥만 한 내 집 마당에 주인허락 없이 침범하여 깊은 밤인 줄도 모르고 피어나는 생명의 향기.

나는 이제야 생전 처음 대하는 계절인양 흠뻑 감격하고 있다. 사색의 잔가지들이 일제히 정비되는 듯하다. 또 기다리고 꿈 꿀 것이 생긴 것이다.

매발톱꽃은 서쪽 담벼락아래 숨어있을 것이고, 계단 옆으론 미나리며 달래들이 삐져나오겠지. 마당 어디쯤 매년 피어나던 그곳에서, 정인의 약속을 기억하듯 자리매김 할 푸르고 고운 님 만날 기대감에 잠겨본다.

 

꿈은 꾸어볼만 하다. 잊고 살다가도 어느 순간 현실이 되고 만다.

내 방을 갖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나 욕심이고 꿈에 불과했으나 놓지 않고 있었는데, 그것이 당장 이루어지게 생겼다.

아파트에 살던 시절.

앉은뱅이 책상하나 들일 공간이면 족하니 방 하나 꾸며달다 했었다. 남편의 시큰둥한 표정 앞에 어린아이 떼쓰는 것처럼 종알거렸다. 베란다 구석 막아서라도 나 혼자 있을 자리 좀 만들어 줬으면 했다. 사실, 아이들 키우는 것에 얽매였던 당시엔 실현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성격이 별나고 예민해서인지 탁 트이거나 밝은 곳에서는 글이 써지질 않는다. 모니터 불빛만 간신히 유지되는 빛깔에 커서가 점으로 깜박이고 있어야만 차분해지곤 한다. 그것이 심장과 같은 박자로 뛰고 있다는 묘한 동질감만이 나의 존재감을 확인시켜준다.

곁에서 미세한 잡음이 들리거나 누가 있어도 싫다. 나 혼자만 꼭꼭 갇힌 틀 속이라야 편안하다. 웅크려 있어야하는 좁은 곳이라도 괜찮다. 방해받지 않을 완전한 내 시간 속에서라야 뭔가 주무르고 탄생시킬 수 있을 것만 같다.  


드디어 꿈에서만 그리던 내방이 생긴다. 달랑 일층 집이던 곳을 증축하기로 했다. 이층집 아줌마가 되는 것이다.

다음 주부터 공사가 시작되는데, 가슴이 두근거린다. 밤중에 마당을 나섰다가도 쉬이 들어오질 못하고 두리번거리며 괜히 옥상 계단을 오르내린다.

공사 담당자가 검정색 금 긋고 간 바닥을 눈으로 가늠해봤다. 화장실 자리라며 표시한 곳에 똥 누는 자세로 쪼그려 앉아본다. 성큼성큼 걸어가면 서쪽 끝이 내 방 자리다. 딱 책상 하나 놓일 면적이면 되는데, 넘치게 크다. 꿈을 과하게 꾸고 살길 잘 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나는 크게 안간힘 쓰지 않았다. 다만, 꿈을 놓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한 것이라곤 기다린 것이 전부다. 막연한 체념의 그것이 아닌,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긍정의 믿음으로 말이다.


스물 몇 살이었던가.

내가 얻은 첫 방은, 보증금 십 만원에 월세 사만 원이었다. 주인집 부엌을 얻어 쓰며 시작된 남의집살이다. 단칸 전세방으로 옮겼다가 거실달린 집을 얻기까지 이십대가 지나갔다. 결혼 후 시부모님 모시고 살다 분가하여 아파트로 이사하고, 화장실 두 개 달린 아파트 장만하고 나니 사십 나이를 먹었다.

마당 있는 단독주택을 꿈꾸며 살았는데, 덜렁 꿈이 이루어졌고 경치 좋은 곳에 밭뙈기도 샀다. 일이 이렇게 되니 자꾸만 꿈이 새끼를 친다. 바랄 것이 생기고 기다릴 것이 남는다.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층집을 꾸미게 된 현실이 믿기지 않아 아직도 어리둥절하다.

방이 생기면 제대로 된 글부터 써야하는데, 벽난로 설치하고 고구마 구워먹을 생각에만 들떠있으니 한심한 지경이다.

어디서 본 것은 있어서 흔들의자 하나 사달라고 했더니, 남편 눈에서 광선이 쏟아진다.

그야말로 갖은 폼은 다 잡는 다는 것이다. 재정상태가 넘쳐나서 실행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의 꿈이 홀씨로 잘못 날아와 내게서 피어나고 있는 건 아닌지 꼬집어보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얼마간의 대여료를 주고라도 빌려 쓰고픈 꿈이다.

 

오늘 우리 집 마당엔 수선화보다, 매발톱보다 주인여자의 꿈이 먼저 피어 풀풀 날고 있다.

봄보다 꿈이 한 발 앞서 피었다.




 

2013년 2월 28일

봄꿈 피던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