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338

나는 건재하다


BY 박예천 2013-01-04

 

나는 건재하다

 

 

 

친구야! 

아까 네 문자에 빠른 답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이해해다오.

저녁식탁을 준비하면서 이왕이면 그 시간에 세탁기도 돌리자 했지.

원래 주부들이 한꺼번에 문어발식으로 일처리를 하잖니.

세제 양 조절하고 세탁기를 작동시켰어.

깜빡 잊고 넣지 않은 빨랫감이 방안에 있더라.

외출할 때 입었던 옷을 서서히 물이 차오르는 세탁조 안에 던져 넣었지.

다시 렌지 앞으로 돌아와 끓는 냄비에 소면가닥을 삶으려고 했어.

아들녀석이 곰탕에 넣어주면 좋아하며 건져먹거든.

국수가닥을 젓가락으로 휘저으려는 순간, 뭔가 허전함이 밀려왔다.

핸드폰이 어디 있더라?

앗! 아까 입었던 스커트 주머니!

총알 탄 사나이처럼 욕실을 향해 날아갔어.

세탁기 뚜껑을 열어보니 물줄기가 이미 옷가지 위로 쏟아지는 중이더라.

눈앞이 캄캄해졌단다.

손으로 방금 넣은 옷을 집어 들었지.

한쪽 끝으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세상에 이럴 수가!

스커트 한 부분은 물세례를 충만히(?)받아 이미 축축하게 젖어있었는데,

어쩜 주머니만 물에 젖기 일보직전인 상태인거야.

얼른 전화기를 꺼냈단다.

다행히 모든 기능이 말끔한 상태로 있었어.

그래서 네게 온 문자도 보고 그제야 답을 했던 것이지.

주방으로 돌아와 냄비에서 부글부글 끓어 넘치려는 소면가닥을 젓가락으로 진정시키면서,

정작 벌렁거리며 놀란 내 가슴은 미처 가라앉히지도 못했단다.


친구야!

나만 이러고 사는 거니?

건망증 심해지고 가끔 멍하니 딴생각을 하게 되는 이 현상이 뭔지 잘 모르겠다.

치료 요할 만큼의 병이 아니라서 웃거나 한숨 한번 쉬고 말지만,

일을 저지르고 나면 기운이 쭉 빠진다.

아까도 그랬어.

세탁기 앞에서 주방으로 슝!

다시 방으로 쌩!

거실에 나오면서 헐레벌떡!!

스피커가 부서져라 의자에 기대앉아 재즈음악감상에 빠져있던 남편표정이,

뭐 저런 여자가 있느냐는......,

어슴푸레한 겨울저녁 빛이 넉넉한 평온을 부르는 공간,

남편은 참으로 유유자적한 듯 보이건만

언제나 나만 동동거리는 삶이다.

왜 자꾸 남의 삶을 빌려 사는 기분이 들지?

이제 그만 돌려준다하면 임대인이 나타나려나.


아참! 네가 문자에 뭐라 했었지?

저녁밥 줄 거냐고 했던가?

와라! 알다시피 손 큰 여자로 소문났잖니.

끼니때마다 우리가족 숫자 더하기 몇 인분은 늘 있다.

그리고 말해 둘 게 있어.

네가 걱정하는 만큼 나 그렇게 심하지 않다.

상처받는 일에도 숙련되었고,

고독을 단물 빠진 껌처럼 오래 씹을 줄도 알게 되었거든.

허깨비처럼 좀 엉성해서 탈이지 나는 아직도 건재하다.

짜장 몇 십 년은 거뜬히 버틸 수 있을 거다.

 

아무 때나 와라!

따신 밥 먹으러.

 

 

2013년 1월 4일

휴대폰 익사직전 살린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