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련(老練)하다는 것

 새해 첫날 휴대전화에 불이난다. 대망의 2013년 대문빗장 열어주느라 곳곳에서 바쁘게 접선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애써 꾸민 메시지가 날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보낸 문자에 왜 답이 없느냐, 받은 적이 없다 장난스런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사실 얼기설기 쏘아대는 수많은 전파들 틈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허니 내리쏘다 충돌할 만도 하겠다.

줄줄이 날아든 문자들 틈에 끼어 내 시선 끌며 맘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좋은 사람과 함께 해서 행복했다. 나이를 먹어 인생이 조금 더 노련해지는 게 참 좋다. 그게 연륜이라는 것이겠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남편 지인의 아내였던(?) -굳이 설명하자면 이혼을 앞둔 상태- 친구 문자이다.

아픈 삶의 질곡을 더듬어주다 벗이 되었다. 결국 남편의 지인은 나와 야릇한 상대가 되고 말았지만 덕분에 사람하나를 얻은 셈이다.

그녀는 나와 성향이 비슷할뿐더러 따뜻한 사람이다. 진국인 아내의 내면을 바라볼 수 없었던 남자만 안타까울 뿐이다. 하긴 부부사이 일이야 타인이 판단할 부분은 아닐 것이다.

 어찌되었든 신년벽두에 받은 신선한 문자가 나를 사로잡았는데, 그건 ‘노련’이라는 단어이다. 사전적 의미를 되짚어 보면, ‘많은 경험을 쌓아 그 일에 아주 익숙하고 능란함’이라 나와 있다.

한 살 나이를 먹는 것에 땅이 꺼지게 한숨 내쉬기보다는 노련함이라는 언어로 표현한 친구의 여유가 부럽다.

쫓기듯 살아왔고, 또 헐떡이며 닥쳐온 일 년을 버텨갈 생각에 멍하니 하늘 쳐다보던 새해 첫날이었다. 불어나는 나이숫자에 맞춰 연륜을 자랑하게 될 만한 노련함까지 겸비한다는 그녀다.

 내 옅은 식견으로 노련함이란, 오랜 시간 주어진 자기분야에 최선을 다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나의 경우, 노련함을 내세울만한 부분은 무엇인가. 눈을 씻고 찾아보지만 뚜렷하게 꼽을 만한 게 없다.

어떠한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다는 불혹 넘기고, 하늘의 뜻을 깨닫게 될 지천명이 코앞인데도, 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불분명한 상태다.

 얼마 전, 몇 사람과 영화‘레미제라블’을 보러 간 적이 있다. 관람 전부터 기대가 컸다. 평소 등장인물인 러셀크로우의 깊은 눈매를 좋아했다. 단지 그것이 이유라기보다 음악적인 부분에 끌렸다. 거대한 음향시설로 감상할 기회에 들떠있었다. 영화 스토리가 진행되는 내내 주제는 부각되고 배우들의 깊은 음색도 짜릿하게 전해왔지만, 그보다 더 한 울림이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절규하듯 부르짖는 장면에서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Who am I!' 가슴중앙에 못질을 하듯 누구냐고 되묻고 있었다. 너는 누구였느냐고.

과연 나는 누구인걸까? 여태 누군가의 삶을 훔쳐 살고 있던 걸까? 거듭 자문하면서 상념 속으로 빠져들었다.

 글을 쓴다고 설쳐대고 있지만, 타는 갈증에 목이 마르다. 유일한 재주라고 여겼으나 치열하게 몰두하지도 못했다. 노련미는 고사하고 연명조차 힘든 지경이다.

어쩌다 원고청탁이라도 들어오면 주눅이 들고 온몸이 쪼그라들며 저려온다. 물론 전업 작가도 아닌 주제에 자신감이 넘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만.

마감일이 다가올수록 시한부 삶인 듯 숨통이 막혀오는 고통을 실감한다. 이러한 상황이니 나만이 간직한 뚜렷한 글 색도 드러내질 못한다. 글의 색이 있는지조차 모호하다. 당당함은 찾아 볼 수도 없고 오히려 내 쪽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벌벌 떨게 된다. 

 친구가 말한 ‘노련’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아등바등 경쟁구도 속에서 이겨 낸 자가 누리는 최고의 완전함이 아닐 것이다. 연륜이 더해가면서 수많은 관계들을 겪어내고 내어주며 터득되는 지혜를 말함이다.

시간의 바다를 항해하면서 닥쳐오는 풍랑으로 고비 넘기고, 순풍에 돛달며 얻어지는 익숙함이다. 움켜쥐기보다는 내려놓게 되는 즈음에 더불어 생기는 여유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일에도 초연하게 되고 그로인해 비롯되는 것. 바로 그것이 노련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그녀의 생각이라면 그렇다는 얘기다.

 대단한 글을 쓰겠다고 목숨 걸 일은 아닌 듯싶다. 물 흐르듯 떠내려가다 비우고 내려놓다보면, 경험과 연륜이 나만의 글 냄새를 풍기게 할 것이다. 살다보면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 노련의 경지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휴대폰 문자함 가운데 도드라지게 떠오른 ‘노련’이라는 글자에 밑줄을 그어 놓는다. 어쩌면 쉽게 얻어질지도 모른다. 세월에 순응하며 내 전부를 맡겨 산다면 노련한 삶을 꾸릴 수도 있겠구나싶다.

 새해 첫날.

뿌듯한 과제 하나를 얻은 기분이다. 조급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나잇값만 제대로 하고 살아도 본전치기는 할 것이므로.

2013년 새해첫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