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 많았다!
개수대에 잔뜩 쌓인 저녁설거지 하려고 막 고무장갑을 끼려는데 전화벨이 울립니다.
표시된 번호를 보니 원주에서 온 시어머니 전화입니다.
“어머? 어머니! 저녁 드셨어요? 거기도 많이 춥죠?”
사흘정도 불면증에 시달리느라 푸석한 눈꺼풀이지만 목소리만큼은 상큼했지요.
혹여 축 처진 음색을 내밀면 울 어머니 어디 아픈 건가 걱정하십니다.
남들은 며느리가 안부전화 때 맞춰 한다는데, 저는 정신 놓고 사느라 만날 어머니 쪽에서 챙깁니다.
너는 잘 있느냐? 아범은 들어왔니? 애들은 감기 안 걸렸고? 이런 식이지요.
오늘은 말 안 듣기로 유명한 큰아들(?) 흉을 늘어지게 보았습니다.
“어머니 큰 아들 정말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허리 아프다면서 절대 병원에 안가는 거 있죠. 한의원에라도 가서 침 맞고 물리치료 받으면 금방 나을 텐데 고집을 부리네요. 좀 혼내 주세요!”
골이 나서 퉁퉁 부은 며느리의 푸념에 어머니는 곧 답을 합니다.
“야! 말도 마라! 말 안 듣는 아들이 거기 하나뿐이면 좋게? 여기도 하나 있잖니. 머리 허옇게 늙은 아들 말야.......!”
어머니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탕한 웃음소리를 전화기 속에 가득 채우십니다.
시아버지도 병원가기 죽기보다 싫어하고, 어머니 말씀을 전혀 듣지 않기에, 며느리 앞에서 이때다 싶게 흉을 보는 것이지요.
주거니 받거니 시간가는 줄 모르게 수다를 떨었습니다.
아이들 크는 얘기부터 옥상에 남겨진 배추가 얼어버리면 어떻게 보관하는지, 애들 방학하면 막내아들네 같이 놀러가자는 말을 하느라 깔깔 웃고 그랬습니다.
딸아이가 고등학교에 가고, 장애를 지닌 아들 녀석은 곧 중학교 입학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다가 어머니 음성이 갑자기 차분해 집니다.
“에휴~! 네가 고생 많았지. 6년 동안 아들하고 같이 학교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겠냐. 니가 잘 가르치고 애써서 좋아지고 있잖어. 정말 네가 고생 젤 많이 했다!”
몰랐습니다.
시어머니가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줄을.
울컥, 콧날 시큰하더니 눈이 쓰려옵니다.
“어머니!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아무도 그런 말 해 준 사람이 없었어요. 고마워요 엄니! 근데요, 남들이 들으면 비웃거나 허망한 생각이라 하겠지만요. 저는 아직도 꿈을 꿔요. 기적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버릴 수가 없어요. 하룻밤 자고나면 모든 일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저 녀석이 멀쩡하게 다가올 것만 같아서요. ‘엄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사실 다 알고 있었는데, 표현이 잘 안 된 거야!’ 이렇게 말하면서요. 호호호 웃기죠? 사실은요....,그거라도 걸고 살아야 버티겠어서요.”
쓸쓸하게 울먹이는 며느리 말에 어머니는 힘이라도 실어주고 싶었는지 조용하게 이 말만 합니다.
“그래!...그래야지!”
약해질까 봐서 내가 내 자신에게조차 할 수 없었던 말.
‘너 고생 많았다!’
어머니가 한방 선수 치는 바람에 홀라당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
코끝에 뭔가 고소한 냄새가 다가옵니다.
서둘러 전화를 끊고 주방으로 갔지요.
아차! 압력솥!
낼 아침 남편이 누룽지 끓여 숭늉 만들어 달라기에 얹어놓고는 까맣게 잊었네요.
시엄니와 훌쩍훌쩍 영화 한 편 찍느라 솥단지만 시커멓게 그을음이 가득합니다.
열어보니 누룽지가 아니라 숯덩이 튀김입니다.
설거지 끝내고 다시 전화해야겠네요.
고생 많았다던 시엄니 말씀에 감동하고 폼 잡느라 솥만 망가졌다고,
새 것으로 하나만 사달라고 조를까 합니다.
좀 억지인가요?
2011년 12월 5일
시어머니 전화 받고 울먹였던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