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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정(錦花亭)


BY 박예천 2011-10-13

 

          금화정(錦花亭)

 

 

 

남편이 땅 욕심을 낸다.

손바닥크기 앞마당에 한 해 농사짓더니, 금세 옥상까지 최신밭뙈기를 만들어 놓았다.

지난여름, 나흘 동안 벽돌을 등짐지어 나르고 흙 포대도 개미가 먹이 운반하듯 계단으로 올렸다.

작지만 길쭉한 밭뙈기가 옥상에 세 개나 생겼다.

정확한 넓이를 말하면 화단 한 폭쯤 될까?

앞마당엔 김장무가 푸르게 그득하고 옥상 밭에도 배추며 가을상추가 풍성하건만,

키워보고 싶은 작물의 종류가 자꾸 늘어 가는가 보다.

갑자기 작은 밭을 사겠단다.

취미삼아 시작한 농사가 본업이 될 상황에 이른 것이다.

퇴직 후, 전원주택 짓고 앞마당 쪽에 밭 일구며 살아보자고 나를 꼬드긴다.

우리 형편에 말이나 될 소리냐고 퉁바리를 줬지만 보채는 아이처럼 포기할 줄 모른다.

지역정보신문 들춰보고 인터넷을 뒤지더니 시간 나는 대로 땅 보러 가잔다.

졸지에 복부인행세 하느라 칠팔월 폭염에도 땅 구경을 다녔다.

부동산사무소 사람들도 우리부부가 원하는 크기가 작아서 인지, 돈 냄새가 나지 않아서인지 애써 흥정을 붙이려하지 않는다.

아쉬운 쪽도 우리고, 똥마려운 사람들도 우리 부부다.

 

가진 돈이 없으니 큰 땅을 바랄 수도 없는 일.

동계올림픽 개최지가 평창으로 정해지면서 그 사이 땅값이 눈에 띄게 올랐다.

하필이면 이런 불리한 시점에 땅 욕심이 어인 말인지.

속초와 양양을 중심으로, 아주 깊은 산속만 아니면 소개되는 밭뙈기마다 보러 다녔다.

몇 년 농사짓다가 지금 사는 시내 집 팔아 이사 가면 된다고 남편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땅 사는 문제가 상점에 진열된 물건 고르는 일처럼 쉬운 일이던가.

진입로가 해결되면 전망이 볼품없고, 해가 잘 드는 남향인가 싶으면 시내와 꽤 먼 거리의 첩첩산중이다.

더구나 한두 푼 걸린 것이 아니다보니, 쉽게 결정할 사안도 아니었다.

여러 날 다녀 봐도 입에 맞는 떡이 없다 생각되어 단념하고 나중에 알아보자했다.

 

 

마음을 비워서일까.

위치와 크기가 적당한 밭이 매물로 나왔다. 잘 따져본 후 값을 치르고 계약을 했다. 드디어 우리 땅이 생긴 것이다.

강원도 고성군 방향에 자리한 금화정(錦花亭)이다.

예상한 금액보다 조금 웃도는 가격이었지만, 주변 경관이 훌륭하고 마을 끝에 붙어있으므로 외진 곳 아니라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평지보다 약간 높은 둔덕이어서 나중에 집을 지으면 전망이 최상일 것이다.

탁 트인 앞으로는 너른 평야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때마침 추수철이라 들녘은 그야말로 황금빛이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천석꾼, 만석지기가 된 양 배가 부르다.

시멘트 포장된 농로 길은 자동차가 왕래할 수 있을 정도여서 산책코스로 안성맞춤이다.

억새풀 하얗게 나부끼는 논두렁과 알곡여무는 냄새가 코끝에 닿아 가을의 정취를 한껏 더해준다.

좌측으로 몸을 틀면 시야가득 들어오는 동해바다.

새벽마다 찬란한 일출을 집안에서 거저 보게 되는 셈이다.

망망대해가 지루하다면, 우측으로 눈길을 돌려보라!

웅장한 설악산 한 폭이 병풍으로 둘러쳐 있고, 선명한 울산바위가 손에 잡힐 듯하다.

통일전망대방향 7번 국도에서 800여 미터쯤 도보로 들어오면 되는 위치이다.

여기까지 적다보니, 마치 관광명소를 소개한 안내원이 된 기분이네.

 

금화정!

이름 석 자 곱고 깔끔하여 귀에 쏙 들어온 마을이다.

땅값 흥정에 밀려 포기하려는 남편을 막판엔 내 쪽에서 더 사자고 졸라서 얻어낸 곳이다.

토양이니 풍수지리설이니 무지하여 알 수 없지만, 지명에서 풍기는 매력이 나를 주저앉게 했다.

어렵사리 동네 이장님 만나 뵙게 되어 이름의 유래를 물었다.

마을 중앙에 정자가 있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비슷한 모양으로 놀이터 앞에 다시 세웠노라고.

그동안 밀어놓았던 가야금을 뜯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반짝 든다.

 

 

또다시 꿈 꿀 것이 생겼다.

내게 있어 꿈이란 희망을 부르고, 지친 삶에 새 힘을 갖게 한다.

시간을 견디게 하고 마침내 도착할 그 곳을 갈망하게 만든다.

묘약으로 간직한 채 되도록 아껴 두며 나의 녹진한 현실을 살아볼까 한다.

 

저녁밥 짓느라 부엌 안을 부산히 오가며 나무도마 딱딱거리는데,

마당비 들고 뒤란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긁어모으는 남편.

낙엽 쓸어 모으는 소리가 오늘따라 정겹다.

성근 빗자루 살들이 몇 가닥 가을찌꺼기들을 흘리고 지나간다.

 

 

건조한 계절만 되면 허옇게 일어나는 살비듬을 날리며 가려움에 힘겹던 그대가,

오늘은 저물어 가는 가을의 등허리를 벅벅 긁어주는구려.

부부로 만난 우리 둘의 인생이 가을 무렵까지 기울어지는 동안 고단한 날들도 많았지요.

훗날 돌아가 기름기 빠져나간 육신이나마 위로하고 보듬어줄 공간이 생겼으니 얼마나 좋은가요.

그 날이 오면,

부실한 아들 데리고 콩 심고 푸성귀 가꾸며 근심 없는 노년으로 삽시다.

거기가 어디냐고요?

 

금화정(錦花亭)이 있잖우.

 

 

 

 

 

2011년 10월 12일

새로운 땅 금화정을 떠 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