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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콩밭에 (4)


BY 박예천 2011-06-01

 

      마음은 콩밭에 (4)

 

 

어느 누가 콩밭이야기를 궁금해 할까.

대단한 사건도 아닌 내용을 이토록 길게 이어가게 될 줄은 나 자신 조차 예측하지 못한 일이다.

시야가 확 뒤집어지도록 콩밭에 변화가 발생한 것도 아니요, 노인의 존재가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 줄거리가 생긴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콩밭이야기를 놓지 못하고 있다.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뭔가가 끈끈하게 이어져 내 예민한 촉수에 와 닿는다.

 

산맥하나 두고 판이하게 다른 기후가 연일 일기예보를 통해 보도된다.

거의 십도 이상 차이가 난다.

초여름 날씨를 방불케 한다는 수도권이나 영서지방과 다르게, 이곳은 오스스 한기가 느껴질 정도의 기온이다.

깊숙이 정리했던 겨울스웨터를 다시 꺼내 시린 어깨에 두르고 다녀야 할 정도다.

마당가에 심은 오이나 호박순은 키가 자랄 기미도 없고 넝쿨손을 내밀려다 저온현상에 움찔 오므라들고 말았다.

내 집 텃밭상황도 그러한데 노지에 돌보지 않는 콩밭인들 오죽하랴.

 

무성한 푸성귀들이 무럭무럭 키가 크는 주변 다른 밭들 가운데 끼어 콩밭은 그저 황토바닥 자체였다. 가장자리에 여린 묘목 몇 그루만 주인의 부재를 알려주는 듯 바람결에 흔들릴 뿐이다.

올해는 안식년을 지내려나보다 생각했다.

한 해 쉬어간들 내년을 기약하면 그만이다 싶었다.

매일 가던 방향과는 달리 오늘은 콩밭 정반대편 사거리에서 신호대기 중이었다.

브레이크 페달 밟은 오른발 끝에 힘을 준채 빨간 신호등만 멍청히 쳐다보고 있었다.

저 멀리 한 사람이 보인다.

구부정하게 엎드린 자세로 뭔가에 열중하는 백발실루엣을 보니 분명 콩밭노인이다.

여름이 코앞인 유월 첫날 게으르게 나타나 빈 밭에서 뭘 하려는 걸까.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노인은 가다서다 반복하고 있었다.

허리춤에서 뭔가 부스럭대고 꺼내는가 싶더니, 곧바로 땅바닥에 엎드린 자세가 된다.

신호가 바뀌고 서서히 차를 움직여 노인의 밭을 눈으로 훔치며 지나갔다.

마침 앞뒤에 차가 없어 최대한 천천히 창밖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넘겨다봤다.

노인이 콩을 심는다.

종다래끼 대신 검은 비닐봉지 옆구리에 차고 콩알을 세어 흙속에 묻고 있다.

녹슬어 끝이 뭉툭해진 호미로는 파낸다기보다 돌밭을 툭툭 건드려 심는듯했다.

손끝에 남아있는 힘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고, 이따금씩 흐린 표정으로 먼 곳을 한참이나 주시하곤 한다.

오늘에서야 노인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유독 큰 눈망울이 내 어릴 적 시골집 외양간을 지키던 누렁이 황소 닮았다고 잠시 생각했다.

씨 뿌리는 일을 체념했다고, 아니면 정신 줄 놓아 까맣게 잊고 있노라 짐작했던 나의 추측 같은 건 한방에 날려버리며 노인은 지금 콩을 심고 있다.

나이 먹어 늙은 황소의 습관처럼 묵묵히  밭으로 나와 둔한 호미 날을 땅위에 포개고 있다.

구부렸다 곧추세우기 반복하다가 허리가 아픈지 주먹 쥔 손으로 등을 두드리며 허공만 바라본다.

 

콩알이 땅에 뿌려지든 새가 쪼아 먹든 간에 나는 노인의 등장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

마지막 잎새라며 희망하나 걸어두겠노라 장황하게 의미까지 부여했는데, 콩밭지킴이로 떡하니 나타났으니 뭔가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다.

관찰일기 기록하듯 나의 일과에 콩밭이 추가로 올라앉을 것이다.

아들의 치료길 언뜻 들어오는 조각그림이지만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병풍 한 폭으로 자리해 있곤 한다.

 

콩밭 할배가 콩을 심는 동안 나는 또 꿈을 꾼다.

초록콩잎물결이 넘실대며 여름한철만이라도 거친 자갈밭을 가려주기를.

사는 일이 버겁다고 부려본 내 엄살도 콩잎 아래 살짝 덮어주기를.

그리하여, 추수 앞둔 가을날쯤은 다음 편 콩밭이야기를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한다.

콩밭에 빼앗긴 내 맘은 영영 마침표를 찍지 못할 것 같다.

어쩐다지?

 

 

 

 

2011년 6월 1일

콩알 심는 노인을 보던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