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설(春雪)에 갇히다
입춘 즈음 내린 폭설이 채 녹기도 전, 또 한 번의 거센 눈 세례를 받는다.
사부작사부작 밤새 쌓인 탓에 대문이 열리지 않을 정도다.
어느 해인가.
오일 내내 밤낮 쉬지 않고 내린 적도 있었다.
상황이 그런지라 발걸음 옮겨 나가는 일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집밖으로 나서 하늘 쳐다보거나 땅을 내려다봐도 온통 백색천지였다. 사람들 표정마저 하얗게 질려보였으니까.
아파트주차장 중간쯤 묻혀 있을 자동차도 찾기 힘든 지경이었다. 모두가 공동묘지에 누운 백색봉분들 같았다.
눈길을 밟는다는 말보다 모세가 홍해바다를 가르듯 눈 벽을 헤치며(?) 갔다.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진 눈 더미에 지붕이 찌그러진 차량도 눈에 띄었다.
그저 아연실색하며 내가 사는 이곳이 대한민국 땅은 맞는지 어이없게 웃곤 했었다.
지난번에 버금가도록 어제오늘 내린 눈의 양도 만만치 않다.
남편은 그날처럼 종일 삽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대문 앞 눈치우기에 여념이 없다.
어설픈 비질이나마 거들겠노라 나서면, 부러졌던 손목 아프다 골골하지 말고 들어가라며 떠민다.
그의 겉옷엔 눈이 스며들어 축축하고 속내의는 땀에 젖는다.
이참에 아들만 신이 나서 마당이며 옥상으로 뛰어다닌다.
푹푹 빠지는 발을 저벅저벅 옮기며 도장 찍기에 바쁘다. 아들의 생각 속 우리 집 마당은 더할 나위 없는 놀이동산이다.
폭신해 보이는지 아예 바닥에 누워 뒹굴다가 눈덩이를 굴려보고 난리다.
철퍼덕 눌러앉아 조물거리며 밀가루반죽인양 뭔가 골똘히 만들기도 한다.
“유뽕아! 너 뭐 만들어?”
“버스 만들어요!”
제 딴엔 원하는 모양이 손으로 뭉치기만 하면 나올 줄 알았는지 끙끙대며 몰두해 있다.
어제 주일예배 후, 내리는 눈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권사님 한 말씀 하시기를.
“눈이 와야 속초지. 삼월 지나도 몇 번은 더 올걸 뭐”
곁에 서서 고개를 끄덕이던 김집사님도 남의 일처럼 차분히 한마디 하신다.
“이렇게 눈이 많이 와야 산불도 안 나고, 가뭄 해결돼서 좋은 거야!”
주거니 받거니 나누는 말을 듣고 있으려니, 십 수 년 간 살면서 나도 속초사람이 다 되었다 싶다.
그 분들 말이 옳다는 생각에 절로 맞장구를 치게 되니 말이다.
사계절 자연풍광이 수려한 속초에 살 요량이라면, 담담히 겪어내야 할 것들이 있다.
바람과 눈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생 거저 얻는 것이 없듯이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 둥지를 틀 작정이었다면 대가라도 치러야 하는 것이다.
물가는 비싸고 백화점도 없다며 투덜거리던 신혼 한 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막막하기만 했다. 잠시 살다 익숙했던 도회지로 옮기게 될 줄 알았다.
복잡한 도시생활보다 자연과 더불어 지내는 것이 아들의 장애에 큰 도움이 될까 싶어 여태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해가 거듭될수록, 녀석은 생각과 몸이 여물어가며 설악의 일부였다가 바다 한 자락으로 머물 줄도 안다.
푸르게 물오른 나무였다가, 스스로 휘몰아치는 파도가 되기도 한다.
눈에 갇히는 날이면 꼼짝없이 동면하는 곰 신세가 된다.
근처 마트도 갈 수 없어 우리가족은 남겨진 식량을 파먹으며 구멍 뚫린 하늘만 바라본다.
지인들에게 걸려오는 전화마다 폭설을 걱정하지만, 냉동실에 저장된 것들 녹여 먹는 중이라며 헬기타고 구조하러 안 오냐고 너스레 떤다.
학교와 학원도 갈 수 없는 아이들은 종일 컴퓨터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느라 졸지에 집안은 피시방이다.
저녁 빛이 이슥해지는데, 밥 할 생각조차 잊은 나 역시 자판을 이렇듯 두들겨대고 있지 않은가.
아직도 창밖엔 남은 춘설이 봄기운을 북돋우려는지 흩뿌려대고 있다.
내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착각으로 가득하다.
공평하게 내려앉는 저 눈의 차디찬 비늘들이 오히려 사방을 푸근히 데우고 있다는.
나의 가난도 너의 부요함도 꼭꼭 덮어두고 그저 넓게만 싸안은 채 가라고,
귀먹은 사람들 알아듣는 순간까지 봄눈은 멎지 않을 작정인가보다.
속초사람 다 된 나를 축복하려는 듯 어제 시작된 눈은 여태 그칠 줄 모른다.
저녁이다.
굴비 네 마리만 굽자.
춘 설
정 지 용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로 아츰,
새삼스레 눈이 덮힌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어름 글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롬 절로
향긔롭어라
웅숭거리고 살어난 양이
아아 끔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 순 돋고
옴짓 아니긔던
고기입이 오믈거리는,
꽃 피기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2011년 2월 28일
종일 춘설에 갇혀 있던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