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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엉을 엮다가


BY 박예천 2010-11-08

 

           이엉을 엮다가

 

 

 

설악산 꼭대기엔 첫눈도 내리고 얼음까지 얼었다는데, 아직 우리 마당엔 햇살이 따사롭다.

마른 잔디밭에 앉아 엊그제 도문리 오권사님 댁에서 얻어온 짚으로 이엉을 엮는 중이다.

오랜 기억 속에만 있던 작업공식(?)을 꺼내려니 손발이 생각만큼 움직여주질 않는다.

지난여름 오이넝쿨 올리느라 새끼줄 꼬아 묶으며 남편을 향해 어지간히 자랑한 게 실수였다. 역시 여자들 손길이 야무지다며 짚단을 추려 내 앞에 놓아준다.

최대한 길고 촘촘하게 엮으라는 둥 옆에서 잔소리일색이다.

해본지 족히 삼십 여년이 지났을 이엉 엮는 일인데, 과연 될까?

 

짚 가닥 몇 개를 매듭짓고 수월하게 첫 공정의 출발이다.

가다듬어 쌓아놓은 단을 오른쪽 발치에 두었다.

철퍼덕 주저앉아 한 쪽 무릎을 세워 꺾고 해야 편하다.

적당량의 짚을 손가락 감각으로 가늠해서 집어 들 때, 곁가지로 따라 올라오지 못하게 나머지 짚단을 발로 잘근 밟고 있어야 한다.

왼손은 지그재그 엇갈린 매듭을 엮어가고 사이사이 가로로 짚이 눕는다.

간격을 고르게 마무리 하는 것이 관건이다. 혹여 조절을 잘못하면 들쑥날쑥 여간 보기 싫은 게 아니다.

조이는 힘에도 강약 조절해가며 심혈을 기울여야 근사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

왼쪽 손목으로 지탱해야하는 힘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늙기도 서러운데 맥이 빠져가는 모양이다. 괜한 영웅심으로 이엉 엮기에 도전했나 싶다.

남편 솜씨가 엉성하거나 말거나 참견 말 것을, 후회막심하다.

 

점점 이엉길이가 늘어간다. 돌돌 말려가는 것이 길이가 제법 될 것이다.

저만치 대나무 자를 들고 ‘삼밭 곽씨’가 달려올 것만 같다.

열 살 무렵이었던가. 어쩌면 그보다 더 어렸을지도 모른다.

고향 마릿골에 위치한 인삼밭 이엉을 엮으러 동네 아이들이 떼 지어 모이곤 하였다.

어른 키보다 높은 대자로 다섯 발을 채워야 이엉 한 마름이 된다.

당시 돈 이십 원을 쳐주었다. 그걸 벌어보겠다고 너나 할 것 없이 인삼밭으로 모여들었다.

나보다 여섯 살 위인 막내고모를 따라 이엉 엮으러 갔다.

지금보다 추운 겨울날.

훌쩍이며 들이마시던 콧물까지 냉기 돌아 골 시리던 그날.

양지바른 짚단 옆에 앉아 이엉 길이를 채워갔다.

풍족하지 못했던 가난도 이유였고, 주전부리 맘 놓고 해 볼 용돈을 벌어보겠다는 앙큼한 생각도 작용했었다.

뱁새눈 양쪽으로 쭉 찢어진 ‘삼밭 곽씨’는 작달막한 키만큼이나 속도 차갑고 밴댕이다.

월급 받는 관리인 주제에 너른 인삼밭이 제 것인 양 행세를 했다.

손바닥에 못이 박히도록 간신히 이어간 길이를 재는 일에도 후한 잣대로 하는 법이 없다.

물론 그렇게 해야 서울 사는 주인이 대 만족 할 것이요, 충직하게 업무수행 하는 것이겠지만 좌우지간 곽씨는 참기름 발라놓은 차돌 같았다.

 

곽씨 역할 남편이 남은 짚을 추려주며 뭐라 구시렁거린다.

감히 내 작품(?)을 놓고 평하거나 논하는가 싶었더니 예전만큼 실하지 못한 마른 짚에게 쏟는 말들이다.

하긴 나도 줄곧 짚을 집어 들며 그 생각 중이었다.

세월가고 세상환경 변한 탓인가.

볏짚 길이가 마릿골 어린 시절에 만졌던 것보다 현저하게 짧다. 푸석푸석 윤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볼품없기도 마찬가지다.

가마니 짜고 멍석이라도 만들 작정이면 실격처리 될 상태다.

낫을 대지 않고 기계로 베기 때문에 길이가 짧은 것이고, 올해 유난히 비가 많이 온 것도 이유라는 뒷얘기다.

나 어릴 적 인삼밭의 겨울은 지금보다 몇 배 더한 바람이 휘돌았고, 냉한 기운이 어깨를 움츠리게 만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것은, 갈무리 할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부족하나마 결실이 남았기에 모아두기 위한 안간힘으로 이엉을 엮는 것이 아닌가.

김칫독 묻고 감나무에 올라 열매를 거두며 소박한 우리 집도 가을걷이중이다.

해 저무는 마당에 앉아, 가지런히 이엉만 늘려간 것이 아니다.

머릿속으로 온갖 것들을 다 엮어보고 있었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내게 엉겨 붙은 가지들을 펼쳐놓자니 삼밭 곽씨 잣대로 한나절은 재야 될 성싶다.

그래도 살아지는 게 인생이다.

이렇게 또 겨우살이 준비를 하지 않는가 말이다.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감 한 톨이 해에 비쳐 말갛게 웃는다.

 

 

 

 

2010년 11월 7일

마당에 앉아 이엉 엮던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