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교교히
다시 잠들 수 없었다.
꽤 오랜 시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반응하려는 몸짓으로 마주보았다.
머리맡에 손 더듬어 휴대전화 액정화면을 본다.
새벽 4시.
일부러 안간힘을 써도 일어나지지 않았던 시각이다.
잠결에도 확연히 느껴졌다.
꿈 많던 사춘기 시절,
솜털 보송한 사내아이가 무리지어 있던 아이들 속에서 보내오던 시선.
못 본 척 고개 숙여 외면하고 있으나 낯이 간지럽던 느낌.
누군가 날 보고 있다.
대충 훑어가듯 지나치는 것이 아니고 뚫어져라 광선을 내쏘고 있음이 전해졌다.
속으로 그랬었지.
저 녀석이 날 맘에 두고 있구나.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이네.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빤히 내려다보는 기운에 잠이 깼다.
더위를 핑계 삼아 침대 던져두고 아들과 거실에 펼친 잠자리.
커튼 젖혀진 바깥엔 마당이 드러눕고 낮 동안 꽃피우고 열매 내놓던 갖가지 식물도 쪼그려 조는 밤 풍경이다.
저들은 이슬을 이불삼아 또 그렇게 새날 준비에 도란거리겠지 상상하며 잠속으로 빠져들곤 하였다.
헌데, 달빛이 건네는 밀어였을 줄이야.
보름도 기울어갈 즈음이니 음력 열여드레 일까.
부옇게 끼어있는 달무리에 운치가 더해졌다.
서서히 달이 흐르고 있다.
동해에서 떠왔을 테니 설악산 향해 나그네 걸음 옮기겠지.
시집간 큰고모가 물려준 꽃그림이불을 덮고 마당중앙 평상에서 잠이 들었던 여름밤.
열두어 살은 되었을까.
오늘 새벽 같은 기운에 문득 잠이 깼던 기억이 있다.
손에 잡힐 듯 내려앉은 별무리.
다시 잠들 수 없을 만큼 신선한 충격이었다.
머릿속을 휘감는 상념의 응어리들이 휙휙 별똥별로 날아가던 기분이었다.
오싹 모골이 송연해지기도 하였다.
넘치게 아름다운 장면은 차라리 두렵게 다가오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 보았다.
혼자보기 아깝도록 창밖에 달 풍경이 그윽하다.
남편을 깨워 사진에 담으라고 할까.
흘깃 고개 돌려 그를 바라보니 콧구멍 최대한 벌려가며 굉음 내뱉고 있는 중이다.
온갖 소음들이 창조되는 두 개의 터널이다.
흔들어 깨운들 운치를 느낄 것도 아니고 오히려 미간 좁히며 짜증낼 것이다.
망설이는 사이 달이 조심스레 걷는다.
뒷모습을 보이려는지 알루미늄 창틀에서 한 뼘이나 벗어난 간격이다.
금세 가려나보다.
쥐죽은 듯 세상은 잠들어 있고, 오직 달과 나만 은밀하게 깨어 고즈넉한 바라기를 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입은 다문 채 빛으로만 꽤 여러 말을 남긴다.
남보다 계절을 앞서 타는 것이 흉은 아니야.
아직도 더위에 헉헉 거리는데 너 혼자 가을앓이를 하고 있지?
지난겨울에도 그랬어.
휘휘 삭풍이 몰아치고 나무 등걸 틈에 새순 나올 기미가 없는데도,
혼자서 봄 열병을 이겨내고 있더구나.
괜찮아, 먼저 아파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감상의 촉수가 예민한 사람들이 바로 계절 전령사 아니겠니?
네 피가 아직 뜨거운 것에 감사하자.
잠 깬 여자 혼자 중언부언 머릿속 거미줄을 걷어내고 있다.
비바람 물러간 자리,
달빛만 교교히 흐르는데.
2010년 8월 27일
새벽잠 깨어 몽롱하게 졸린 여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