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설거지
형님, 저는 괜찮아요. 말해놓고 뒤돌아 울었다는 거다.
수술비에 보태라고 쌈짓돈마냥 감춰놓았던 얼마를 보내줬다. 일곱 살 조카딸아이 내년 학교 입학하는 날 주려고 넣었던 적금인데 해약했다.
고맙다, 죄송하다 말하는 막내동서 음성이 물기 젖어 들려온다.
전화기너머 태연자약 애써 웃음 흘리는 모습이 짐작되어 위로하려던 나도 말더듬이가 된다.
열두 살 차이, 나와 띠 동갑 동서가 암에 걸렸다.
수술하면 일상생활에 무리가 없다 하여도 암은 암인 거다.
검사결과 나오기 전, 암으로 짐작된다는 의사 말에 오히려 나를 안심시키며 여유 부리더니 오늘 전화 속 목소리가 다르다.
나약해진 말투로 띄엄띄엄 전한다.
형님, 울지 않으려 했는데 막 눈물이 나요.
같이 울 수 없었다.
아무려면! 내가 큰 형님이거든.
남들 다 하던 말로, 누구나 아는 얘기를 해줬다.
편한 맘을 가져라, 애들 엄마니까 힘내라며. 넌 혼자가 아니다, 나 같은 형님도 있지 않느냐고 대포소리로 강한 척 외친 후 전화를 끊었는데.
젠장! 가슴이 미어지며 눈물은 왜 내 눈에서 청승맞게 쏟아지느냐 말이다.
절묘하게도 때마침 하늘에선 굵직한 빗방울이 떨어진다.
맥 풀려 멍청히 앉아 있다가 점점 거세지는 빗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고향 마릿골 고샅 들어서며 할머니인지, 아니면 어머니였을까. 마당 안을 향해 다급하게 부르는 듯 귓가에 쩌렁쩌렁 울려온다.
뭣들하고 있냐? 하늘이 시커먼데 비설거지 좀 해놓지 않고!
여름밭일 나가셨다 먹장구름 몰려오니 집 걱정되어 한달음에 오신 거다.
이천 원에 샀다는 딸아이의 비닐우산을 펼쳐들고 마당으로 나섰다. 뭐부터 해야 하는지 우왕좌왕 정신없다.
후드득 벌써 몇 방울 어깨위로 내려앉는다.
우선 지난 주말 친정어머니가 보낸 고구마를 쟁여 상자에 담고 비닐 돗자리로 덮었다.
계단 난간 밑에 매달아놓은 마늘 한 접은 온전할까 들여다보고, 토끼장 앞으로 뛴다.
마트 청과물코너에서 먹이용으로 얻어온 양배추 잎 무더기가 젖을까 벽 쪽으로 밀어놓았다.
겅중거리며 마당을 뛰어다니는 와중에도 호박잎 아래 몇 개나 더 숨었을지, 오이는 그 사이 새끼를 더 낳았나 살피기에 바빴다.
퍼붓는 장대비 뭇매를 견디지 못한 풋감들이 텃밭위로 나뒹굴고 있다.
주인남자 퇴근해 들어와 저 꼴 보면 에고 아까워라. 한숨 꽤나 흘리겠구나.
이왕지사 비설거지 한다고 설쳐댔으니 나온 김에 아직은 속빈 항아리들이지만 구색 맞춘 장독대도 살피고, 두리번거리며 집안 단속하는 안주인 흉내를 제대로 내보고 있는 중이다.
담장 옆 앵두나무집 커다란 떡갈나무 잎사귀가 빗방울샤워에 찜통 여름먼지 씻어내는지 그저 간지럽게 흔들린다.
축축해진 옷가지를 털어내며 출발지였던 거실로 돌아왔다.
넋 놓고 앉아 격자무늬 유리창 밖 비 그림을 내다보고 있다.
전부 태워버릴 듯 이글거리던 태양이 열기를 접고 쉬는 사이 이때다 싶게 내려주는구나.
시원하게 식혀주는 단비에 고맙다고, 모처럼 후련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자꾸 막내동서 낯빛만 어른거린다.
또 울컥 한 덩어리가 꺽꺽 채워지고 무겁다.
대단하게 한답시고 마당과 집주변을 서성거리기는 했는데 뭘 하다 들어온 것인지.
헌데, 왜 비설거지라 했을까.
음식을 먹고 난후 마무리 순서로 정리하는 것이 설거지인데, 비 오기 전 설거지라?
비단 부엌그릇 씻는 것에만 아니라, 여기저기 널려있는 물건들 치우는 일을 뜻하기도 한다는 사전적 의미.
비 오기 전 유비무환의 설거지이든, 퍼 부은 다음 난장판 정리할 완전무결의 설거지이든 몫을 다하면 되는 거다.
사랑하는 막둥이 동서야!
스물 초반 시집와 고생도 넘치게 많았던 세월을 내가 안다.
자분자분 내리는 비의 양도 몸속으로 들어오면 골골 앓더라.
한 차례 쏟아질 폭우이겠지만, 미리 알게 되어 다행이라 여기자.
두렵고 서글픈 맘 다잡고 비설거지 차분히 해보는 시점으로 삼았으면 한다.
비 그치면, 인생 어느 언덕쯤에 일곱 빛깔 무지개 그어지는 날도 오지 않을까?
새로 펼쳐질 언약의 표시로.
널 믿는다.
2010년 8월 23일
막내동서 인생비설거지 시작하던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