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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길 사람들 5 - 빌라의 여인


BY 박예천 2010-08-10

               

               빌라의 여인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은 그녀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골목길에 세워둔 자동차 문을 열려는 순간이다.

“차를 이렇게 세워두면 어떻게 해요? 앞차 뒤에 바로 붙여 놔야지 다른 차도 세울 수 있잖아요!”

졸지에 나는 무식쟁이 여편네가 되고 말았다.

속사포로 내쏘는 말만 어리둥절하게 듣다가 차분히 답했다.

“이틀 전에 주차 해 놓은 거예요. 제 앞에 세웠던 차가 빠져나가 틈이 생긴 거구요. 남에게 피해 주면서 살만큼 저 그렇게 몰상식한 여자 아닙니다.”

사실이 그랬다. 아들이 아파 결석하는 바람에 대문 밖으로 나온 것도 때마침 병원 가려던 참이었으니까.

약간의 감정실린 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서 일까.

여자는 계획된 용무를 마친 사람처럼 휙 돌아서더니 빌라 건물로 들어간다.

하이힐이 찍어대는 포도위에 또각또각 소리가 박자 맞춘 욕설로 들려온다.

지난봄의 일이다.

 

빌라는 우리 집 대문과 마주서있는 삼층 건물이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있어 낡고 오래된 건물임을 한눈에 짐작할 수 있다.

공원길마을 곳곳에는 그렇게 ㅇㅇ빌라라는 공동주택 여러 동이 자리 잡고 있다. 연립주택 형태로 지어져 한 곳에 여섯 가구 정도가 모여 사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껏 ‘빌라’라는 어감이 고급스럽거나 호화판으로 여겨졌었다.

적어도 내 옅은 식견이 정한 기준이 그렇다는 얘기다.

일부 형편없는 의식수준의 사람들로 인해 단독주택으로 이사 온 것이 후회되는 요즘이다.

집을 선택하기 전, 주변 이웃에 대한 조사먼저 할 걸 그랬다.

버젓이 남에게 피해 끼치는 행동을 일삼으면서도 뻔뻔스럽게 외면하다니.

주차 똑바로 하라며 내게 으름장을 놓던 그 여자도 빌라 한 칸에 삶 덧대어 산다.

공무원냄새가 물씬 풍기는 모양새로 보아 어디 관공서에라도 다니는가 싶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역시 짐작대로 모여자중학교 음악교사란다.

어쩐지 남편에게서 맡아지던 고리타분(?) 선생님 냄새가 나더라니.

으뜸바른생활로 사는 양 훈계하듯 지시하더니 얼마 후, 빨간색 그 여자의 차가 엉뚱하게 방향 틀고 주차 방해될 위치로 골목에 서 있는 꼴을 보았다.

에이! 화딱지 난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빌라의 여인들은 하나 둘씩 혀 내두르게 할 만큼 상식이하 짓을 서슴지 않는다.

한여름 폭염 열기는 밤중에도 식을 줄 모른다.

집집마다 훤히 창문을 열어젖혀도 바람 한 점 없는 열대야에 잠들기 쉽지 않다.

겨우 잠속으로 빠져들려는 꿀맛의 몽롱함조차 박살낼만한 소리들이 여름밤마다 계속된다.

더구나 그것이 내 침실 창문 바로 앞이고 보니 진저리치게 환장할 노릇이다.

유독 소리에 예민한 내게도 문제가 있겠지만 빌라의 여인들은 정도가 심하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새벽 두세 시에 왁자지껄 떠든다. 부스스 잠깬 눈으로 방충망 틈에 얼굴을 맞대고 내다본다. 고등학생들일까.

남녀가 떼를 지어 몰려다닌다. 어디선가 굉음을 터뜨리며 오토바이까지 합세한다.

지쳐 누운 사람들이 평온에 기대어 쉬는 주택가의 밤이건만 아랑곳하지 않는 자세들이다.

낮 동안 피곤에 절었는데, 또 홀라당 한 여름 밤을 뜬눈으로 샐 참이다.

속에서 뭔가 한 덩어리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반드시 신고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남편이 나보고 참으란다.

아휴! 박여사 성질 많이 죽었네.

 

며칠 전 그 한밤중에도 잠자기 글러버린 일이 생겼다.

간신히 꿈속을 헤매는가 싶었는데, 카랑카랑하다가 나긋하게 코맹맹이 목소리로 둔갑을 했는지 교태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골목을 가르고 내 방 창문 거침없이 파고들어온 음성 때문에 우리 집 견공도 이미 잔뜩 짖어대고 있었다.

참고 기다려보자. 졸음이 다시 쏟아지면 청신경도 둔해지겠지.

허나 그건 내 욕심일 뿐이었다. 한 옥타브 치켜 올라간 여자의 음색은 슬슬 간드러지며 고양이 앙탈로 변해가고 있었다. 애인과 밀애를 속삭이나보다.

떠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비벼대며 창문가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희미한 시야에 여자 하나가 들어온다.

한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새벽 네 시로 향해가는 이 시각, 공원길이 떠나가라 통화중이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먼저 봤던 그 여자다.

스물 너 댓 살은 되었을까.

나긋나긋 속삭이던지, 한곳에 앉아 꾸준히 대화할 것이지 온 골목을 휘젓고 다닌다.

깔깔 웃기도하고 내 차 앞에 기대섰다가 혹은, 우리 집 바깥 화단가에 앉기도 한다.

전봇대에 달린 가로등불빛을 쳐다보며 중얼거리는 중이다.

야간근무를 하는 여자인가 혼자서 별 추측대본 다 써보며 여자의 정신상태 감정까지 하느라 멀건 밤이 다 접힌다.

아이고, 빌라여자들 때문에 내가 못 살아!

 

여름이 속히 가기만을 바란다.

창문 꼭꼭 닫아걸면 잡소리쯤 걸러지겠지 싶다.

공원길 오래 된 사람들은 그동안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냈는지, 북향집 할배에게 여쭤볼까.

 

입가에 손나팔을 만들어 세우고 들릴 듯 말듯 빌라건물 향해 외쳐본다.

 

여인들!

밤마다 나의 단잠 거두어 간 너희 행실을 반성하여라.

제발 와서 빌라, 정중히 사과하며 빌라!

열심히 빌기라도 해야 집 이름값은 하겠구나.

손이 발 되도록 내게 빌라!

으앙! 빌라의 여인들이여!

 

 

 

 

2010년 8월 10일

별난 이웃 빌라의 여인들 바라보던 한여름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