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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만 같아라!


BY 박예천 2010-05-15

잡초만 같아라!


 


 

처음엔 파릇한 것이 전부 새싹인줄로만 알았습니다.

꽃샘추위 극성인 이른 봄부터 마당 안에 삐죽삐죽 솟아나는 것들이 죄다 잔디로 보였으니까요.

봄 가뭄에 마를까, 고개 내밀다 기운 빠질까 정성껏 물을 뿌렸지요.

벌 나비 떼 날아드는 계절의 여왕 오월로 접어들자 초록이긴 하나 가려낼 것들로 가득합니다.

이제 내 집이니 옛주인 탓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지만, 참 지독히도 마당 건사를 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하긴요. 과일나무든 침엽수든 마구 뒤엉켜 옆집 담을 넘던 지난겨울 상황이 떠오르네요.

일이 그 지경인데 잔디밭인들 제 꼴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새 주인 만나 나무도 말끔히 이발을 하고, 곳곳에 나물이며 꽃들도 자리 옮겨 심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점점 햇살기운을 찾아 다듬어져 갔습니다.

텃밭과 과일나무, 꽃들은 남편에게 떠맡기고 오직 잔디밭은 내 몫이라 큰소리 쳤는데 난감합니다. 잡초가 반이 넘습니다.

썬 크림이니 자외선 차단제니 애초에 바르지 않고 민낯으로 다니는데,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잡초 고르는 일이 고역입니다.


해 뜨거운 시간은 피해 이른 아침이나 서늘한 저녁기운에 잠깐씩 앉아 뽑지요.

마치 전등불 앞에 앉아 머릿니와 서캐를 골라내던 유년의 할머니처럼 잡초를 찾습니다.

삐죽이 키가 올랐거나 색이라도 튀어 보이면 좋겠는데, 생긴 모양도 색도 분간이 힘듭니다.

초록의 종류가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실감하겠더군요.

어른들께 바른 소리 내뱉고 주둥이 질 곧잘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진즉에 울 어머니 밭일이라도 이렇듯 도왔다면 착한 딸이 되었을 겁니다.

심부름은 죽어라고 안하고 땡땡이치며 놀러 갈 생각만 가득했던 그 때엔 농사일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어머니도 그랬지요.

 

“넌, 절대로 농사꾼한테 시집가지 말어! 맏아들도 안 된다. 공무원 하는 막내아들 만나서 월급 받아 편하게 살어. 알겠냐?”

 

세뇌시키다 못해 주문으로 머리에 각인을 해주셨습니다.

당신 혼자 쩔쩔매며 가을걷이 하더라도, 책 한 줄 더 읽으라며 딸에게 농사일을 한 번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자식들 시켜먹을 줄 모른다며 할머니에게 온갖 싫은 소리 들어도, 어머니는 논밭 가는 길에 제 이름을 불러내지 않으셨습니다.  

그 덕에 저는 농작물 파종 시기나 종류를 잘 알지 못합니다.

농부의 딸로 태어났으면서 그런 것도 모르냐며 남편에게 핀잔을 듣는 일이 다반사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대로 월급쟁이 공무원을 만나기는 했지만, 남자는 맏이였습니다.


아하, 얘기가 곁길로 나갔네요.

잡초 뽑는 일을 말하던 중이었던가요?

짜증 가득한 얼굴로 구시렁대며 잡초를 골라내다 보면, 가끔 녀석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에 잠기기도 합니다.

표현이 좀 과장되긴 하겠지만 뽑고 돌아서면 그 자리에 또 올라올 정도랍니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생명력하나는 끝내주더군요.

누가 양분을 날라다 주길 합니까, 오며가며 예쁘다하거나 대견하다거나 칭찬을 합니까.

비바람에 저절로 뽑혀나가는 일도 드물지요. 하여간 굳세고 질긴 것이 잡초들입니다. 

잡초 같은 인생이라고 누군가 말했지요.

되는대로 막 살아왔다는 뜻으로 내밀었을까요? 

잔디 좀 살려보겠다고 두 눈 부릅뜨고 뽑아내고는 있지만, 녀석들에게 손발 다 들고 인정하고픈 것이 있습니다.

척박한 땅이든, 질척한 습지든 탓하지 않고 자란다는 것입니다.

부족한 양분 때문에 혹은, 병충해를 입어 비실대고 있다는 잡초이야기는 못 들어 봤거든요.

악의 근원인양 불행의 씨앗인양 이 잡듯 헤치고 있지만, 가만 보면 녀석들도 곱습니다.

살겠다고 매정한 주인여자의 호미 날을 피해 안간힘을 쓰는 모양도 보입니다.

어쩌다 불어오는 미풍에 간지러운지 파르르 잎을 떨어 댈 줄도 알더군요.

번식력은 어찌나 강한지요. 엊그제 싹이 나오는가 싶더니 벌써 씨앗을 매달고 있습니다.

요즘 저 출산시대라며 한 걱정 하는데, 잡초만 같으면 저절로 낳고 크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름에 해가 가려진 사이 잠시 앉아 잡초를 뽑다보니 엄청난 살인자가 된 기분도 들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하다 내친김에 쉬어간다고 냉수한잔 들이킨 후 몇 마디 나누려다 수다만 길어졌네요.

마저 뽑기는 해야 할 텐데, 자꾸 미안해지니 큰일입니다.

일하기 싫어 꾀부리는 건 절대 아닙니다.

명색이 잡초 밭이 아닌 잔디밭이니 골라내긴 해야겠지요?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행복한 주말 되십시오.


 

 

 

 

 

2010년 5월 15일

마당 가득한 잡초를 뽑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