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왕좌
출근을 해도 남편의 머릿속에는 온통 집 생각만 가득한 것 같습니다.
‘날 추워서 배추 싹이 얼겠네. 밭에 보일러라도 틀어야 하는 거 아닌가.’
‘비 온다. 지하실 공사한 곳 물 새는지 상황보고 바람.’
휴대폰 문자마다 오로지 집 걱정뿐입니다.
‘아예 집을 등에 메고 다니시구랴’라는 답을 보내놓고, 혼자서 픽 웃고 말았습니다.
똑딱 시계가 따로 없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확하게 퇴근하여 대문으로 들어섭니다.
좋아하던 사진 찍기, 등산, 낚시도 한동안은 잠잠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들은 손바닥만한 마당 안에서도 충분하게 해결되는 모양입니다.
살구꽃이 피는 것에, 머위 싹이 나오는 옆에서도 쭈그리고 앉아 렌즈를 들이댑니다.
(살구꽃이 탐스럽게 피었습니다. 손바닥 만한 여린 머위싹도 보이네요^^)
갖가지 구비된 농기구로 싹 위에 흙을 북돋아주고 목마를 새 없이 물도 자주 뿌립니다.
채소 싹 움터 나오는 것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더니 한마디 합니다.
“야! 난 저것들이 자식들보다 마누라보다 더 이뻐 죽겠다!”
곧 지방신문에 나올지도 모릅니다.
배추 싹이 예뻐서 흙 위에 엎어져 죽은 남자 있다는.
(텃밭에 배추싹들 입니다^^ 자식들과 마누라 보다 애지중지 돌보는....)
남자는 집안 곳곳을 단장하고 구색 갖추느라 여간 바쁜 게 아닙니다.
이것저것 물건 사오고 채워가는 일에만 온 신경을 쓴답니다.
햇살 포근했던 며칠 전.
저는 아들과 미용실에 갔었지요.
뽀글파마 한번 해주라던 딸아이 말에 아들녀석 머리스타일을 바꿔볼까 해서입니다.
내친김에 제 머리까지 손질하느라 두어 시간 넘게 걸렸습니다.
“빨리 오지 않고 뭐해? 대충 가위질만 하고 얼른 와!”
젖먹이 아이처럼 남편은 또 전화 속에서 버럭 거리다가 징징댑니다.
“손님이 많아서 그래. 좀 기다려요!”
사람들 앞이라 화낼 수 없어 최대한 교양 있는 콧소리를 내며 답해주었지요.
‘집에 가서 보자구! 나이먹은 남자가 잔소리만 늘어가는 꼴이라니...흥!’
속말을 되씹으며 화를 삭이고 있었답니다.
시간이 되어 집으로 왔지요.
씩씩거리며 대문을 박차고 들어서자마자 마당으로 달려갔습니다.
“당신 말이야! 남자가 뭘 그렇게 채근을 해? 머리하는 게 얼마나 오래 걸리는 줄 알어? 그리고.....엉? 근데 저게 뭐야?”
(왼쪽 두번째 의자가 바로....여왕(?)인 제 자리랍니다^^)
속사포로 쏘아대던 저를 멈칫하게 만든 게 있었습니다.
장독대 앞 잔디밭에 빨간 플라스틱의자 네 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 게 아닙니까.
왜 있잖아요. 포장마차나 길가 작은 구멍가게 앞에 있던.
솔직히 촌스럽기가 그지없었습니다.
싸구려 티가 팍팍 났거든요.
헌데 우리 시어머니 말씀이 남자들 뭐 사왔을 때 좋다 멋있다 해야 한다는 군요.
“어머! 자기야 저게 뭐야? 얼마 줬어? 빨간색이라 더 예쁘네!”
맘에 없는 말을 하며 계단 아래로 내려가 섰습니다.
“응. 이건 만원이구 나머지 세 개는 삼천 원씩 줬어. 싸지?”
만 원짜리 의자는 등받이와 팔걸이까지 있습니다.
나머지 세 개는 그냥 보조의자였지요.
“와! 이거 좋다. 이게 내 의자 맞지?”
단 하나뿐인 빨간 등받이의자에 턱 걸터앉았지요.
그리고는 호미 들고 텃밭을 주무르는 남편과 마당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향해 외쳤지요.
“여봐라! 여긴 내 자리다. 알겠느냐? 너희 전씨들 세 마리(?)는 나머지에 앉거라..흐흐흐. 똑바루 해 이것들아!”
저만치서 남편이 어이없는 표정을 하고 쳐다봅니다.
“난 여왕이야. 당신은 내시, 딸 너는 무수리, 아들은 포졸! 알았지?”
혼자서 북치고 장고치고 공포를 해버렸습니다.
낄낄대며 빨간 왕좌를 차지하고 앉기는 했는데.....,
남편을 내시라 임명해놓고 과연 저는 행복한 여왕이 될 수 있을지요....쯧쯧쯧!
참으로 앞날이 걱정입니다요.
2010년 4월 23일
빨간 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