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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 내 이름은 박 건망


BY 박예천 2009-08-19

 

          내 이름은 박 건망



한여름 해의 높이가 바다와 설악산 중간위치에, 더도 덜도 말고 딱 거기쯤에 머물게 되면 스멀거리며 졸음이 쏟아진다.

대충 집안일 끝내놓고 한낮의 나른함과 씨름하던 중이다.

쪼그리고 졸까, 아예 퍼져 누워버릴까 중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휴대전화가 바르르 제 몸을 떨어댄다. 문자 하나가 왔다는 거다.

‘나 오늘 야간자율학습 감독이라 늦는다. 알고 있기나 했냐? 건망아!’


감히 내게 겁도 없이 ‘건망’이라는 별명을 턱 붙여주는 그.

발끈하며 분내지 못함은 스스로도 인정하기 때문이다.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특별한 별명 없이 싱겁게 살아온 삶에 재미를 더해주려는지 새로운 이름, 건망이란다.

자칭 총명하고 기억력 좋다 자부했건만 오호 통재로다, 몰락의 시대가 다가왔도다!

동네 누구 생일이며 누구네 집 잔칫날과 제삿날까지 줄줄 읊었던 것이 내 머릿속이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이다.

세월이기는 장사 없다고 이제 서서히 기억장치가 노쇠현상을 보이고 있다.

나이 탓만은 아님을 알고 있다.


건망증의 원인이야 다양하겠지만 추측하건대 내 경우엔 문어발식 신경나누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급하고 침착하지 못한 성격도 일 몫을 한다. 아니면, 여러 번의 수술하느라 마취가 잦아서 일까.

어느 가정이든 주부의 역할이 우아하고 차분하게만 그려지지 않는다.

특수한 상류층 제외하고는 거의 ‘지지고 볶다’라는 표현을 써야 제격인 것이다.

한정된 용량이 초과하고 만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나뉘고, 집안 대소사를 처리 하느라 쪼개지다 보면 엉뚱한 사고만 치게 된다.

또한 성질이 어찌나 급한지 나는 늘 몸 따로 맘 따로 이다.

한마디로 마음은 소녀시대인데 몸이 원로배우다. 연예인의 예를 들어보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어쩌다 내 꼴이 이리 되었을꼬.

냉동실에 꽁꽁 얼어있는 행주 뜯어내고, 과일 칸에서 빨갛게 웃고 있는 지갑을 꺼내던 일이라니.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나갔다가 빈 통을 그냥 두고 몸만 덩실덩실 걸어오기도 한다.

딸아이가 혀를 끌끌 차며 “울 엄마 이젠 내가 챙겨야 되겠네!” 했었다.

 


박 건망아줌마의 며칠 전 이야기다.

주말을 맞이해 시댁에 온가족이 모였다. 마땅히 여름휴가도 못 다녀오신 시부모님 뵙고 형제자매 물가에서 보양식도 챙겨먹자는 취지였다.

아무리 시댁이 잘해 준다 한들 며느리 입장에선 어렵고 불편한 법이다.

깐깐한 시어머니 모시던 신혼시절 생각하면 사실 마주하는 시간도 피하고 싶다.

구구절절 가슴 아팠던 일들이야 많지만 여기 옮겨놓지도 못한다.

왜냐?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속없는 여자처럼 닭다리 뜯어 주거니 받거니 시댁 어른들과 시동생, 시누이를 챙겼다.

돌이켜보면 먹는 음식 놓고 설움 당한일도 꽤 여러 번이건만 도대체 생각나질 않는다. 마치 낳고 품어 키운 자식마냥 편하게 웃고 떠들다보니 어느새 가슴 가득 편안함이 밀려왔다.

살면서 남편에게 섭섭한 일은 또 얼마인가. 시댁과의 관계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를 갈며 갚아 주리라 치부책에라도 적어 두었다면 모를까. 도저히 시시콜콜 떠올릴 재간이 없다.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수는 물에 새기라 하지 않았는가. 어리석은 누군가는 거꾸로 한다고 들었다.

다행인 것은 다른 셈에는 비교적 계산적이면서도 버릴 것을 속히 물에 흘려버렸음이다.

그래서 함께 부대끼고 사는 거다.

이처럼 가끔은 나의 새로운 이름 ‘박 건망’이가 제 구실을 해 낸다.

대형사고(?)만 -가스 불 위에 냄비가 홀딱 타서 화재위험이 있다든지 가족과 이웃들에게 민폐만 끼치지 않는 범위라고 해두자-아니라면 적당한 건망증은 애교로 봐줄 수도 있다고 본다.

아니 그러한가?

하여 나 박 건망이는 절대 기죽지 않고 살 거다.

들어라 남편!

잊지 말고 꼭 기억해두길 바란다.

나의 건망증으로 인해 그대의 부실함이 채워져 무사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다 쓰고 나니 변명치고는 진짜 구차하다. 웃음이 절로난다.

그나저나 내일 오후에 누굴 만나기로 했더라?

이 정신에 글을 쓴다는 자체가 바로 기적인 거다.





2009년 8월 18일

박 건망여사 뭔가 지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