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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 누리는 값


BY 박예천 2009-08-03

 

누리는 값

 


새벽 두시가 다 되어가는 지금.

달아난 잠을 다시 불러들일 마음이 싹 가셔버렸습니다.

서울 사는 막내동서가 속초에 휴가차 왔지요.

시동생 사업이 불경기태풍속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빈궁한 삶을 꾸려가는 중입니다.

어디 놀러 다닐 형편은 아닌데, 친척들 틈에 섞여 오게 되었답니다.

맏동서 사는 속초이니 그냥 갈 수 없었다며 늦은 밤 숙소에 아이들을 재워놓고 왔습니다.

 

맥주한잔 하고 싶다기에 조촐한 술상을 봐주었네요.

쌓인 앙금은 조금이나마 풀고 갔는지......

자고 가라는 말 뒤로한 채 택시타고 방금 떠났습니다.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꾸 눈물이 아른거리며 휘청거렸지요.

권하는 맥주를 거절 않고 받아 마신 탓이려니 혼잣말로 변명하려는데 그게 아닌 모양입니다.

이토록 모니터 앞에 앉은 의식이 명료해지니 말이지요.

가엾고 측은해서.....,

자꾸 눈앞이 시큰거리고 깜빡이면 뭔가 쏟아질 것만 같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인데,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왜일까요.

 


속초는 사람살기엔 더없이 좋은 곳입니다.

천혜의 자연이 펼쳐놓은 풍광이야말로 어디에 비할 수 없지요.

바다와 마주보고 장엄하게 서있는 설악산.

눈을 비껴가는 곳마다 한 폭 수채화요, 거대한 예술작품입니다.

돈 한 푼 안내고 날마다 누리고 삽니다.

 


넋 놓고 살다가 피서 철만 되면 그 값을 다 치르게 됩니다.

하여간 피붙이를 시작으로 친척부터 연줄만 닿게 되면 갑자기 전화가 오지요. 

오래 소식없던 사람들도 이 때엔 아는 척을 합니다.

대충 안부정도 묻던 사이가 휴가철에는 절친한 동지로 변합니다.

방 좀 알아봐 달라, 어딜 가면 신선한 회를 먹을 수 있느냐 등등 연락을 해옵니다.

고향이 아닌 곳에서 십여 년 넘게 살다보니 편하게 안주하게 된 속초입니다.

여름만 되면 몸살을 앓는 지금이 참 못 견디게 힘이 듭니다.

가까운 거리에 볼일 보러 가는 일도 고역입니다.

꽉꽉 들어찬 차들과 넘치는 사람들로 붐비기 때문이지요.

간단한 일을 처리하러 나섰다가 도로에 갇혀버리기 일쑤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난 다며 맏동서인 저를 만나러 온 서울 댁.

가슴 아린 얼굴을 대하는 것도 모두가 그놈의 여름휴가 때문 인듯하여 화가 납니다.

이제 서른 갓 넘긴 동서가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부자로 떵떵거리기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생활비걱정, 아이들 유치원교육비 날짜 조바심내지 않으며 지냈으면 합니다.

 


몰랐으면 했습니다.

형님, 정말 힘들어요! 하는 소리 귀에 들리지 않았으면.

택시 태워 보내는데 자꾸 땅바닥이 구불거리게 보입니다.

몇 잔 마신 맥주의 취기가 이제야 올라오나 툴툴거렸지요.

기막히게 아름다운 도시에 살며

맑은 공기, 거대한 자연경관 누리고 사는 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입니다.

 


명치끝에 내내 알싸한 매운 기운이 올라옵니다.

술 트림일까요?

삶을 누리는 값은 어느 정도 치러야 흥정이 끝나는 것인지.

고통도 아픔도 값을 탕감하기엔 역부족인가 봅니다.

큰 형님은 고작 막둥이 동서에게 얼굴 봐서 좋았다,

편히 잠자라는 문자 한통 날리고 긴 한숨 내쉬었네요.

 

 


휴! 겨울밤만 기나긴 것이 아니네요.




2009년 8월 3일 새벽

뭐라 썼는지도 가물가물한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