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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릿골 20 - 그해 겨울


BY 박예천 2009-01-06

 

                 그해 겨울

 


 

아버지가 읍내 오일장에서 무쇠화로를 사오셨다. 전에 쓰던 질화로가 깨지는 바람에 살림장만을 하게 된 것이다. 튼튼한 새끼줄로 동여맨 청회색 화로에서는 비릿한 쇳내가 났다. 마른 헝겊에 들기름 묻혀 어머니가 정성껏 윤기 나게 문지르고 양쪽 손잡이는 뜨거움 방지용 나무를 덧대어 놓으셨다.

 

사랑방부엌 불꽃이 아궁이 안에서 고무래 손길로 끌려나와 부삽에 담긴 채 화로 안으로 귀양 온다. 불 머리가 이글거리다 결국 잠잠히 잿더미 안으로 숨어들면 무쇠화로 가득 온기가 모인다. 군불로 달구어진 온돌은 바닥을 데우고 솜털이 곤두서는 방안 한기는 화롯불의 책임이다.

목화솜 이불 안 우리 삼 남매는 그렇게 얼기설기 다리를 포개 얹기도 하며 할머니 곁에서 잠이 들었다.

막내 동생 녀석의 너스레 섞인 애교는 도를 넘는다.

“할머니 젖이 엄마보다 커서 좋다.”

손을 할머니 가슴속에 넣고 주물럭대다 꿈속으로 빠져든다.


화롯불 온기가 서서히 주검으로 변해있을 새벽 무렵.

문틈으로 새어드는 바람이 정신을 번쩍 나게 하고 꿀맛 같은 단잠을 앗아간다.

실눈을 뜨고 방안을 보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이불 안에 안 계시다. 웅크리고 버둥대다보면 서서히 아랫목부터 데워오던 그 아스라한 따스함. 매캐한 연기냄새 섞여 들려오는 것은 할아버지 군불아궁이 속의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

손자들이 추위를 느낄세라 부지런히 불을 지피셨다. 어둠이 채 걷히지도 않은 이른 새벽에 부엌바닥으로 끌려 나갔던 무쇠화로가 다시 제 속 알맹이인 불덩이를 싸안고 방안으로 들어온다. 하루에 두 번 저녁과 새벽에 불씨가 들어오고 나간다. 


부엌 무쇠 솥에서 일차적으로 끓여진 국이나 찌개가 다시 화롯불 구멍쇠 위로 올라앉아 보글거리곤 했다. 낮에 가끔 할머니는 달구어진 인두로 할아버지 한복 깃이며 고름을 반듯하게 만드셨다.

 

여고시절이었던가. 

읍내와 집을 오가는 버스간격은 늘 정해져 있었고 시간차가 많이 나서 지루했었다.

짧은 겨울 해는 오후 수업이 끝나자마자 제 모습을 남한강 너머로 숨겨버리고 어둑해진 버스 대합실에 찾아드는 추위가 배고픔을 더해주었다.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울퉁불퉁한 삼 십리 시골길 지나 집에 도착한다. 이미 가족들은 저녁상을 물린 후였다. 허겁지겁 방안으로 들어와 아랫목 이불을 살짝 들추면 스텐주발 밥그릇이 손에 잡힌다. 때맞추어 손녀딸 먹게 하려고 할머니가 이불 밑 온기에 가두어 놓은 것이다. 화롯불 위에서 알맞게 끓고 있는 된장찌개.

버스 도착시간에 맞추어 일부러 간이 심심하게 해 놓으신다.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밥상에놓인 찌개를 한 숟가락 먹어보면 기막힌 맛이라니. 어찌 그것이 화학조미료 첨가된 맛이며 소고기 으뜸부위가 들어간 맛이겠는가. 할머니 정성어린 손맛과 서서히 타오르던 화로의 불씨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것이라 하겠다.       

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