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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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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 새댁!


BY 박예천 2009-01-06

 

새댁!

 


봄기운은 언 땅을 녹이기도 전에 내 가슴팍에 벌써부터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있었다.

아지랑이 쳐다본 적도 없고 나무마다 움트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도 않았는데

욱신거리며 명치끝부터 아려온다.

그래서 봄 인줄 알았더랬다.

생각지도 않았던 첫사랑.

그녀석이 어젯밤 꿈속 주인공역할에 혼신을 다해 연기에 몰입하더라니.

어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봄날의 내 꿈을 훔치러 오는가.


남편과 아이들이 직장으로, 학교와 유치원으로 떠난 빈자리는 몽땅 내영토가 된다.

낯선 자의 침입을 오전 내내 외면하리라.

거울속의 여자는 가관이다.

겨우 양치질만 끝낸 터라 머리카락은 베토벤이요, 얼굴은 각설이다. 꼼짝하기가 싫다.

오늘은 씻지 않고 버텨 볼 거다.

모든 게 봄 탓이다.

아니 그놈의 첫사랑 꿈만 꾸지 않았더라도 나른함이 덜 할 것인데.


얼갈이배추 겉절이와 식은 두부찌개로 이른 점심을 먹는다.

폼 나게 커피한잔을 타들고 베란다 앞에 앉아 일광욕을 시작했다.

눈 꼬리를 치켜뜨고 부서지는 햇살을 보니 온통 그리운 것들뿐이다. 

젠장! 황혼을 맞이하는 노년도 아니건만 머릿속에 흔들리는 것들이 죄다 그립군.

또다시 죄 없는 봄을 향해 돌팔매질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오늘은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를 현관 앞으로 달려가 맞이하지 않는다.

그 까짓 거! 대충 봄 때문이라고 얼버무리고 말면 되지.

녀석의 재잘거림이 도통 귀에 들리지 않는다.

이제 보니 봄기운에 귀까지 먹었나보다.


거꾸로 매달아놔도 간다는 시계가 자꾸 돌아 밥 때를 알려온다.

본업에 박차를 가해야 하건만, 엉덩이를 들어 올릴 맘이 안생기니.

지갑을 겨드랑이에 끼고 터덜터덜 근처 마트에 간다.

이동화원인가?

꽃과 화분이 도로 옆으로 즐비하게 진열되어있다.

한쪽 옆에서는 분갈이도 해주고 화분을 팔기도 한다.

저녁 찬거리를 몇 가지 사고 돌아오는 길.

주머니 속에서 지폐를 주물럭거린다. 살까? 그냥 갈까?


오래 서있기 힘들어져 쪼그리고 앉았다.

두 줄기 꽃대에 봉오리 맺혀있는 풍란을 쳐다보는데 자꾸 마른침이 넘어간다.

망설이며 이리저리 잎사귀만 건드리고 있는데,

“새댁! 이봐 새댁아!”

설마 날 부르는 것일까 싶어 무시하고 다시 풍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이! 내말 안 들려? 그거 자꾸 만지면 다 망가진단 말이여.”

어깨를 툭툭치는 바람에 놀라 쳐다보니, 오마나! 그 새댁이 바로 나였다.

아무리 장삿속인 영업성 발언이라지만 솔직히 너무했다.

새댁이라니.........묵어도 한참 중고인 헌 댁인 것을.


새댁이라는 달콤한 그 호칭에 흐물흐물 녹아내려 결국 풍란하나 사들고 왔다.

어느 분 왈,

아가씨라 불렀으면 화원을 통째로 샀을 거란다.

아! 봄 때문에 나는 다 망가졌구나.




2005년 3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