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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 내 맘은 비를 맞고


BY 박예천 2009-01-05

 

내 맘은 비를 맞고....


 


 

아침부터 쉴 새 없이 비가 내린다.

잠시 비가 그치니 초록 빛 잎에도 잔디 싹에도 온통 싱그러움만 가득하다.

목안까지 매캐했던 먼지조각들은 남김없이 물기 젖은 흙냄새 속으로 곤두박질  치고 있다.

공평하게 뿌려지는 장대비다.

사람들 사이에 묵은 때로 끼어있던 서글픔이나 우울함 들도 이렇게 내리는 비속에 펼쳐 놓아 단 한 번의 세정식을 통해 씻겨 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록은 의기 양양 제 빛을 더해가며 고개 숙인 내 시들음 앞에 조소를 보내고 있었다.

다시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나의 시들음은 물기를 뽑아 올려 잎부터 초록을 간직하게 되겠지만 요즘은 정말이지 꼼짝하기가 싫다.

오랜 기억 속의 그립던 벗이 불쑥 내 곁을 방문한다 할지라도 전혀 반갑지 않을 것이고

누군가 내게 엄청난 별천지로 여행을 하게 되는 기회를 주더라도 아무 느낌이 생겨주지 않을 것 같다.


내 이런 병이 불치는 아니다.

일부러 작정을 하고 기간을 정한 사람처럼 며칠 전부터 동굴 속을 헤매는 기분이다.

현실에 불만족스럽다거나 일탈을 꿈꾸지는 않는다.

아무리 눌러대고 찔러봐도 기름기 가득한 돼지비계 살을 꼬집는 격으로 아무 느낌이 없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나름대로 고독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아득한 묘미가 있다.

나는 그 아픔을 조금씩 질겅거리며 칡뿌리를 씹듯 입안에서 굴리다가 즙이 가득해지면 한 모금씩 목젖 뒤로 넘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서글픔의 무게가 짙어지는 날엔 목안으로 시큰한 가래 한 덩이 넘기듯 눈물 삼키면 그만이다.  

밥을 지을 때가 되면 의식은 먼 자리에 앉아있는데 몸뚱이만 부산하게 쌀을 씻어 불린다. 지글거리며 두부찌개를 끓이고 상대방 가슴에 비수를 꽂던 선홍빛 혀가 맛과 간을 보기 시작한다.

마치 때맞추어 울려야 제 사명을 다하는 자명종처럼 움직이고 있다.


오늘 내리는 비는 나를 잠시 젖게 한다.

숱하게 몸 밖으로 내 놓았던 나의 언어들이 조각나고 부서져 잿빛 도로 위에서 빗물 되어 튀고 있다. 

이렇게 몽롱한 늪 속에 빠져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때 아주 생소한 곳에 던져져 있을 듯 한 착각을 한다.

때로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베어내며 아프게 했을 내 언어들이 밤이 깊도록 내리는 이 빗속에 살아 꿈틀댄다.

말갛게 하늘 열리면 내 말들은 살아서 햇살 한웅큼씩 담고 반짝이는 사금파리가 될 거다.

이름도 모르는 물고기 비늘로 다시 돌아와 박히는 상상에 몸을 움츠린다.


빗물은 모여 개울로, 강으로, 그리고 속초 앞 푸른 바다에까지 머물겠지.

그러면, 바다로 하여금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지.

딱 한 가지만 부탁해야겠다.

 

내리는 빗속에서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중언부언하는 입에 재갈을 물려달라고.



2004년 7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