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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릿골 15 - 장마에 얽힌 추억 하나


BY 박예천 2008-12-27

 

           장마에 얽힌 추억 하나

 


 

 

거대한 황톳물이 일렁이며 무엇이든 집어삼킬 듯 개울을 뒤덮고 있었다.

잠시 비가 그친 어느 날, 삼촌과 남동생들이 양동이와 족대를 들고 미꾸라지 잡으러 간다며 준비를 하신다. 재미있는 볼거리라도 있을 듯하여 허겁지겁 동행을 했다.

개울 앞 도랑을 시작으로 삼촌은 족대를 세워 잡으시고 큰 동생은 물풀사이로 다리 휘저으며 고기를 몰았다. 막내 동생은 양동이 당번이 된다. 자리를 옮길 적마다 쪼그리고 앉았다가 서기를 여러 번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양동이에 늘어가는 미꾸라지들은 통 안이 비좁은지 제 몸을 꼬아가며 버둥거리고 있다.


길게 이어진 논 옆 도랑을 모두 훑으신 삼촌이 이제는 좀 넓은 개울로 가자고 하신다. 거대한 강줄기를 옮겨 놓은 듯 거센 물줄기로 황톳물이 흐르고 있었다. 장마 전에는 맑은 속을 드러내던 곳이 지금은 깊이를 가늠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물속까지 따라들어 갈 용기를 내지 못하는 나는 풀 섶을 따라 걷기만 했다. 막내 동생까지 고기몰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양동이는 내 차지가 되었다. 저만치 족대를 세모꼴로 세우고 삼촌이 소리친다.

“이쪽으로! 팍팍 밟으면서 몰아봐!”

질퍽한 개울가를 걷다가 그만 미끈하는 느낌이 내 발 근처로 오는 듯하더니 아끼던 샌들 한 짝이 벗겨져 물위로 둥둥 떠내려간다. 신발이 떠내려간다고 소리를 쳐봤지만 삼촌일행의 거리는 너무 멀고 물살이 거세기도 하다. 감히 신발을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도 빠르게 제 모습을 감추는 샌들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기만 했다.

장날이면 엄마를 졸라 얼마나 어렵게 마련한 신발인데 이렇게 한순간 없어질 수 있는가를 생각하며 큰소리로 울었다.

미꾸라지 잡는 것에 아무런 흥미도 느낄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 삼촌은 손수 추어탕을 끓이느라 텃밭에서 파를 뽑아 오시고 양념들을 준비했다.

끝내 나를 외면하고 떠난 샌들 한 짝만 머릿속에 가득 채워져 있다. 잠도 오지 않는 밤에 오래도록 흘러 가버린 신발의 행방이 강물이나 바다에까지 도착했을 상상으로 끙끙거렸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습한 기온을 반짝 말리고 싶은 날들이 이어졌다. 장마가 지나자 폭염이 밀려와 예전의 제 모습을 찾은 개울가로 아이들이 모여든다. 멱을 감기도하고 군데군데 숨어있는 찰흙을 파내어 이것저것 만들어보기도 했다. 우리들 중 누군가 개울가를 따라 더 넓은 하류 쪽으로 가보자는 제안을 해왔다.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모래를 밟으며 물살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가려는데 눈에 반짝 들어오는 주홍빛 점하나가 풀 속에서 선명하게 보였다. 이끌리듯 그곳을 주시한 채 친구들을 벗어나 마구 뛰어갔다.

아! 몇 날을 꿈에서만 애타게 찾던 내 샌들 한 짝이 물풀에 걸려 더 멀리 떠내려가지 못하고 멈춰있는 것이다. 그 감격이라니.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으로 지금껏 남아있다.


장마 때 물살이 거세지는 하천을 보면 곁을 훌쩍 떠났다가 돌아온 신발 한 짝이 떠오른다. 다시는 미꾸라지 잡는 곳에 따라가지 않으리라.

 

 


2004년 7월 13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