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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 딸아이의 선물


BY 박예천 2008-12-26

 

딸아이의 선물

 


3월 21일, 오늘은 결혼기념일입니다.

작년기념일엔 남편의 감기몸살로 이틀 밤을 새며 간호하느라 그냥 넘어갔지요.

저녁때가 다 되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워낙에 이벤트를 모르고 선물도 쑥스러워 전하지 못하는 남편의 성격을 아는지라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슬슬 서운해지려합니다.

참으로 무심한 남자 같으니.


조금 우울해지는 기분을 전환해보려는 마음이지만 화장을 시작합니다.

안방 화장실에서 뽀얗게 분칠하고 있는데 퇴근한 남편이 들어옵니다.

역시나 까맣게 잊은 모양인지 츄리닝으로 갈아입고 거실바닥에 누워 티브이만 봅니다.

자기야! 나 오늘 저녁밥은 안 할 거예요.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봅니다.

애들하고 외식할거니까 함께 가기 싫으면, 혼자 밥을 챙겨먹던지 라면 끓여먹으라는 말에 그제야 눈치를 챕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으며 쑥스러운지 미안함 때문인지 큰소리로 애매한 날짜 탓만 합니다.

어느새 가버렸느냐, 챙겨야 할 기념일들이 왜 그리 많으냐.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중얼거립니다.

아직 봄비는 내리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혼자 맞고 왔는지 비 맞은 중처럼 그렇습니다.

뭐라고 한마디 쏘아대니 농담인데 뭘 그러느냐 쳐다봅니다.

남자들은 참 이상하죠?

미안하다는 간단한 말이 있는데 핏대 세우며 힘든 여러 말을 합니다.


평소 먹고 싶어 하던 생선가스 집에 갔습니다.

메뉴판을 받아들자 동행한 가족들을 무시하고 외치는 말은 여기 생선가스 넷이요.

눈을 흘기며 메뉴판을 뺏어들며 함박스테이크로 주세요!

그리고는 한마디 하기를.

제발 다른 여자와 음식 먹을 때는 그러지 마쇼.

먼저 뭘 먹겠느냐고 물어보도록 하쇼.

내 앞에서만 그렇게 하쇼. 부탁이오.

남편이 마구 웃습니다.


그런데 딸아이의 행동이 수상합니다.

실내공기가 더운데도 겉옷을 벗으려 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음식이 나오자, 짠 이제 선물을 받으세요....합니다.

어디서 샀는지 핑크빛 축하카드에 신랑신부 그림도 그리고, 깨알 같은 편지도 적었습니다.

열 살 된 딸아이가 갑자기 장성한 자식으로 보입니다.

비닐에 싸인 선물도 있습니다.

플라스틱 구슬 같기도 하고, 요즘 유행하는 비즈공예인 듯도 합니다.

주황색, 분홍색 반지 두개를 손수 만들었다는군요.

젊은 애들 말하는 소위 커플링이라는 것이겠지요.

모처럼 깔깔대며 저는 시장 통 아줌마처럼 웃어봅니다.

끼어보니 손가락에 아주 잘 맞습니다.

장난스레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남편(?) 안 부럽다.

딸과 남편이 키득거립니다.

감동하는 엄마가 보기 좋았는지, 아니면 이왕에 점수를 더 따고 싶었는지 딸아이가 한마디 더 합니다.

난, 이다음에 엄마 병들어도 내다 버리지 않을 거야.

뭔 말 인고하니, 어느 책에선가 고려장풍습을 읽었나봅니다.

버리지 않고 어찌하겠느냐 물으니, 엄마 잘 먹이고 보살피겠답니다.

말만 들어도 감격스럽더군요.

병들면 집 나갈 거야. 너 힘들게 안 해.

딸아이는 다부지게 한마디로 마침표를 찍어버립니다.

내가 못나가게 문 잠그고 지킬 거야.


결혼기념일.

딸아이의 선물로 우리가족이 다시한번 꼭꼭 다져집니다.

 



2005년 3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