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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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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 아홉 내 할아버지


BY 박예천 2008-12-23

 

 여든 아홉 내 할아버지.

 


 

며칠 전 새벽 친정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할아버지의 위독함을 알려주시며 아무래도 맘의 준비를 하라는 말씀이다.


내가 스무살의 나이를 먹을 때까지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늘 친구 같은 모습이셨다.

겨울엔 두 남동생들의 썰매와 방패연을 손수 만들어 주셨고, 어린 내 손을 잡고 장터나, 국악가수 오던 한글날 행사에도 잘 데려가 주셨다.

텔레비젼이 없던 유치원시절, 저녁상을 물리고 온 가족이 둥그렇게 안방에 앉으면, 손자들의 노래와 재롱으로 힘차게 박수치시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가 이제 먼길을 홀로 떠나시겠다고 고집 부리신다.

칠십 중반이 넘으시던 연세에까지도 농사일과 집안 일을 하셨다.

여름이면 개울 뚝 너머에서 할아버지 모습보다 꼴지게가 넘실대며 먼저 걸어왔고, 눈 쌓이는 겨울이면 아버지가 깊은 산에서 해오신 나뭇짐을 도끼로 다듬고 단을 묶어 차곡차곡 헛간에 쌓으시며 흐믓해 하셨다.

사랑부엌에서 구수하게 냄새나던 소죽을 커다란 고무양동이에 담으시고, 외양간으로 옮기실 때는 늘 내 이름을 부르셨다.

당신혼자는 그 무게가 힘겨우셔서 함께 들어달라고 하셨던 거다.


모시적삼 곱게 입으시고 동네입구 똘똘이네 수양버들 앞에 흰 학처럼 서 계시던 할아버지가

이제, 누런 수의 입으시며 봄 꽃핀 산으로 가신다고 한다.

지난 식목일에 친정에 갔었다.

기력이 쇠잔해지셔서 지병한번 없으시던 분이 눈조차 맘대로 뜨지 못하시며 누워 계신다.

내 목소리를 들으시더니, 눈을 감은 채로 말씀하신다.

“oo가 보구 싶어.....보구 싶은데 못 봐....”

“할아버지, 눈을 떠야 보이지....나 여기 있어요.  나 좀 보세요”

잠시 힘겹게 두 눈을 뜨시던 할아버지가 눈가에 눈물을 보이시더니 다시 눈을 감으시며,

“멀리 시집 갔잖어....그래서 못 봐.” 하신다.

속초에 사는 손녀딸을 그 동안 말씀은 없으셔도 많이 보고싶다는 생각을 하셨나보다.

나는 할아버지의 생신 날 태어났다.

만삭인 엄마가 할아버지 생신 상 차렸던 그릇들을 다 치우고, 누에똥을 가려주던 밤 열 시쯤에 나를 낳았다고 어릴 적부터 들어온 얘기였다.

그렇게, 나는 할아버지와 늘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손녀딸이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버이날이니 명절이니 하는 기념일엔 부모님보다는 언제나 할아버지, 할머니를 먼저 챙겨드렸다.

두분 돌아가신 다음에야 부모님께는 잘해드린다는 변명만을 둘러대고 말이다.

생각처럼 내 삶은 여유롭지 못했고, 부모님께 잘 해드리겠다는 계약서를 쓴 적도 없건만, 나는 늘 마음 한구석이 죄인처럼 눌려왔다.

작년에 병원에 입원하시며 위기를 넘기셨던 할아버지.

그때도 생신을 며칠 앞두고 있었는데.....

‘내 생일날 너 안 올래? ’

자신 없는 목소리로 삶의 연장 줄을 부여잡으시더니 그렇게 일년을 사셨다.

생신이 사나흘 남았건만, 나에게 생일날 오라는 말씀이 없으시다.

그렇게 손녀딸 혼자 맞는 생일로 남겨 두시고 먼길을 떠나시려는 것일까.


보릿쌀 너댓말과, 솥단지, 수저 두 세 벌로 시작한 할아버지의 세간살이가 지금으로 오느라고 그렇게도 숨이 차셨던지 호흡조차 고르지 못하시다.

엿장수 가위소리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뒤란에 있는 쟁기 보습을 떼어 주고 막내고모랑 흰 엿가락을 늘어지게 빨고 있다가 할아버지 큰 호령에 혼쭐나며 도망치던 그 정정함이 이제는 그저 먼 기억 속에 한 장면으로만 멈춰지겠지.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것이지?

엄마가 말씀하신 맘의 준비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아직 가족 중에 누구도 먼저 떠난 이가 없는데.....

나는 경험하지 못한 그 일에 밤마다 몸서리를 친다.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나 죽는 날까지 할아버지는 내 가슴에 묻히신다.

해마다 생일이면, 함께 미역국을 뜨시던 백학처럼 고우시던 모습으로 내 가슴에 사뿐히 내려 앉으시겠지.


삶과 죽음의 신고식을 덤덤히 치를 수는 없을까.

이토록 정수리에 말뚝이 박히는 고통이 없었으면 좋겠다.

터져 나온 붉은 핏톨 들이 온 사방으로 흩어져 황사먼지 퍼지는 속초의 하늘을 뒤덮고 있다.

할아버지..........내 할아버지.

그 하얗던 고무신, 지푸라기 수세미로 양잿물 비누 묻혀 닦아 댓돌 위에 세워 놓고 못난 손녀딸이 뽀송하게 예전처럼 말려 놓을 테니,

손수 대님 깔끔히 묶으신 그 발을 들이밀고 사뿐히 신으세요.

그렇게 걸어서 당신이 다니시던 논과 밭,

새터말, 두름두리, 피물, 기리울, 바우배기, 골고루 다녀오십시오.

내 할아버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