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 탁
(병상에 계신 할아버지께)
거절 말고 들어주십시오
오줌 싼 고쟁이
며느리 손이 갈아 입혀 드리니
창피하다, 이불 덮어라
고개 숙여 울지 마십시오
명절이면 잘 방 없다 오지 마라,
생신 때는 먹고픈 거 없다 오지 마라
소리 크던 당신이
이제는 아이처럼 우는군요
내 생일 때 안 올래?
해 지는 여름이면 갯 뚝 너머
넘실대는 꼴 지게
눈 내리는 겨울엔 장작 패서 포개는 소리
아직도 여물 쑤던 무쇠 솥,
아궁이며 부지깽이 그 곳에 있고
사랑부엌 천장은 그을음으로 가득한데
당신은 자꾸 어디를 가신다는 것입니까
마릿골 똘똘이네 집 앞
수양버들 연두 빛 잎새 밑으로
학처럼 모시적삼 풀 먹이시고
곱게 서 계시던 당신이
지금은 옥양목 소독약 냄새 시트위에
꼬부라져 누어 계십니다
부탁입니다
거절 말고 들어주십시오
단 한번만 큰 호령으로
시집 간 손녀딸의 친정나들이를
오지 마라 해 주십시오
고춘자, 장소팔 만담이 재밌다더라
안비취 경기민요 잘 한다더라
네 살박이 손녀 손에 찐 계란 사서
소금에 눌러 먹여 주시던 그 영릉에
철쭉이 뽀닥뽀닥 눈 흘기며 앉았을 것입니다
하나뿐인 손녀딸 결혼식
머리 허연 늙은이 사진 버린다
식장 밖으로 도망가신 내 할아버지
그런 당신이 겨우 도망가신 곳은
여주 읍 새로운 병원 501호
부탁입니다
거절 말고 들어주십시오
헛기침 한번으로
누우셨던 몸을 반으로 접었다 펴시며
일어나십시오
솥 단지 한 개,
수저 두 세 벌,
보리쌀 너 댓 말로 시작한 세간이
지금으로 오는 동안 당신이 그렇게 숨이 차셨군요
속초 사는 손녀딸의 목소리를
전화 속으로도 대답하기 힘겨워
싫다, 끊어라 끓는 가래 탓만 하십니다
당신의 생신 날 태어난
버르장 머리 없는 손녀딸이
이제 여든 여덟 생신을 위해 친정 나들이를 갑니다
촛불을 마주하고
당신의 호흡으로 끄고 싶은데
산소 줄, 링거 줄이 당신을 침상에 묶어 두었군요
할아버지, 부탁입니다
몇 푼 안 되는 용돈
꼬깃꼬깃 문갑에 모아두고 열쇠 채우시던
그 꼼꼼함으로 다시 안방에 앉으십시오
올 여름
풀먹인 하얀 모시적삼
다시 볼 수 있게
춤추는 학처럼 일어나십시오
- 2002년 4월 24일 손녀딸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