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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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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께


BY 박예천 2008-12-23

 

                                                                  부  탁


                                      (병상에 계신 할아버지께)

 

 



거절 말고 들어주십시오


오줌 싼 고쟁이

며느리 손이 갈아 입혀 드리니

창피하다, 이불 덮어라

고개 숙여 울지 마십시오


명절이면 잘 방 없다 오지 마라,

생신 때는 먹고픈 거 없다 오지 마라

소리 크던 당신이


이제는 아이처럼 우는군요

내 생일 때 안 올래?


해 지는 여름이면 갯 뚝 너머

넘실대는 꼴 지게

눈 내리는 겨울엔 장작 패서 포개는 소리


아직도 여물 쑤던 무쇠 솥,

아궁이며 부지깽이 그 곳에 있고

사랑부엌 천장은 그을음으로 가득한데


당신은 자꾸 어디를 가신다는 것입니까


마릿골 똘똘이네 집 앞

수양버들 연두 빛 잎새 밑으로

학처럼 모시적삼 풀 먹이시고

곱게 서 계시던 당신이


지금은 옥양목 소독약 냄새 시트위에

꼬부라져 누어 계십니다


부탁입니다

거절 말고 들어주십시오





단 한번만 큰 호령으로

시집 간 손녀딸의 친정나들이를

오지 마라 해 주십시오


고춘자, 장소팔 만담이 재밌다더라

안비취 경기민요 잘 한다더라

네 살박이 손녀 손에 찐 계란 사서

소금에 눌러 먹여 주시던 그 영릉에

철쭉이 뽀닥뽀닥 눈 흘기며 앉았을 것입니다


하나뿐인 손녀딸 결혼식

머리 허연 늙은이 사진 버린다

식장 밖으로 도망가신 내 할아버지


그런 당신이 겨우 도망가신 곳은

여주 읍 새로운 병원 501호


부탁입니다

거절 말고 들어주십시오


헛기침 한번으로

누우셨던 몸을 반으로 접었다 펴시며

일어나십시오


솥 단지 한 개,

수저 두 세 벌,

보리쌀 너 댓 말로 시작한 세간이

지금으로 오는 동안 당신이 그렇게 숨이 차셨군요


속초 사는 손녀딸의 목소리를

전화 속으로도 대답하기 힘겨워

싫다, 끊어라 끓는 가래 탓만 하십니다


당신의 생신 날 태어난

버르장 머리 없는 손녀딸이

이제 여든 여덟 생신을 위해 친정 나들이를 갑니다






촛불을 마주하고

당신의 호흡으로 끄고 싶은데

산소 줄, 링거 줄이 당신을 침상에 묶어 두었군요


할아버지, 부탁입니다

몇 푼 안 되는 용돈

꼬깃꼬깃 문갑에 모아두고 열쇠 채우시던

그 꼼꼼함으로 다시 안방에 앉으십시오


올 여름

풀먹인 하얀 모시적삼

다시 볼 수 있게

춤추는 학처럼 일어나십시오






                                   - 2002년 4월 24일 손녀딸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