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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릿골 1 - 소쩍새


BY 박예천 2008-12-22

 

                                마릿골 소쩍새



 어성전(魚城田)의 맑은 계곡을 다시 못 보게 될 줄 알았다.

태풍‘매미’와 ‘루사’의 횡포는 참혹했다. 가옥들과 농토가 삽시간에 황톳물 속으로 사라졌다.

지형을 바꿔놓고 사람들 가슴마다 할퀴며 생채기를 남겼다.


 ‘물이 깊어 고기(魚)가 많고 주위의 산은 성(城)과 같으며 밭(田)이 기름져 가히 부모를 모시고 처자를 기르기에 적합한 골’이라는 뜻의 제 이름을 영영 잃는가 싶었다. 복구공사가 한창이던 어성전의 모습은 그야말로 참담한 최후로만 여겨졌다.

허나 올여름 다시 찾아가니 어성전은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인공호흡기를 떼어내고 자기 숨을 몰아쉬느라 안간힘을 쓰는 양이 역력하게 전해졌다.


 삼복더위를 피해 가족나들이로 어성전을 향해 가던 날. 과연 발 담글 물 한줄기 제대로 흐를까 궁금했다. 도착해보니 몇 해 전의 아픔을 잊은 채 묵묵히 맑은 물이 흐른다. 아이들을 따라 물속에 몸을 던졌다. 발끝에 무엇인가 긁히며 상처를 남긴다. 건축물 잔해였을 시멘트 덩어리에 달린 철근가닥이다. 누구네 집 벽이었으며 가족을 감싸는 울타리였을까 생각하니 희미하게 가려졌던 통증이 살아난다. 표면은 잔잔하여 오래전부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화롭게 흘러만 가는 물살이다. 높은 다리기둥 윗부분에도 차마 떠내려가지 못한 그날의 나뭇가지들이 몇 가닥 걸려있었다.

어성전의 물줄기가 다시 살아 숨 쉰다. 두 번의 태풍을 겪어낸 뒤 한결 성숙해진 흐름이다.


 강원도 양양에는 어성전의 물줄기가 사람들의 마른 가슴을 적셔주고, 경기도 여주 마릿골 땅은 내 어머니가 날마다 달구질로 다진다.

배고픈 며느리 소쩍새가 되어 피토하며 운다지만 마릿골 소쩍새는 가슴 미어져 운다.

어성전은 맑은 물줄기 다시 흘러 악몽의 태풍을 잊게 했지만, 마릿골 폭풍우는 몇 해를 넘기도록 몰아치며 멈출 생각을 않는다.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는 날. 태풍의 눈은 어머니를 향해 나지막이 읊조린다.

 “늙어 죽어지지도 않고 너만 힘들구나. 내 밥에 독약을 타거라.”

강원도 사는 딸은 친정어머니 하소연 상대로 지목되어 전화선 너머의 통곡을 가슴위에 포갠다.

 "할머니 가여워 어쩌면 좋으냐!”

같이 울어주는 것 밖에 마땅히 도움이 되지 못해 또 억장이 무너진다.

이년, 저년, 죽일 년의 악담이 쏟아지며 살림살이 박살나는 날. 어머니는 할머니의 치매를 까맣게 잊나보다. 젊은 날 모진시집살이 되살아나는 지 온전한 정신의 시어머니가 쏟아내는 말로 듣는다. 한밤중 신작로를 내달리고 학교마당을 마구 뛰어다니며 마릿골 땅에 달구질을 시작한다. 정신없이 울부짖는 소쩍새가 되고나면 가슴 한 구석 후련해지려나.  

 “형님! 나 뻘건 팥 넣고 팥죽 좀 쑤어줘.”

오늘은 며느리가 손위동서로 둔갑을 한 날이다. 팥을 불리며 내쉬는 깊은 한숨이 강원도 딸의 귓가에도 스친다.


 발 동동 구르며 울음 쏟아내던 소쩍새가 서서히 태풍을 다스리는 법을 익혀간다. 모진 바람 속에서도 평화를 불러내는 어머니 표정이 느껴진다. 

몰아치는 비바람이 두려워 회피하거나 몸서리치지 않으신다. 거친 물살에 몸을 맡기고 더불어 흐르는 방법을 알아내셨다. 매순간 바뀌는 할머니의 공간으로 뛰어 들어가기로 하셨다. 체증이 뚫리는 듯 어머니의 숨소리가 어느 날 부터인가 잔잔해졌다.

마릿골 태풍이 한번 씩 몰아칠 때마다 회한의 고부간 갈아엎고 묵은 앙금 걷어내며 찌꺼기들을 분해시킨다.

 “엄니! 마당에 한번 나가보실래요? 바람 쐬라고 손자가 의자 갖다놨네요.”

 “올케 성! 나 어딜 데려 간다구?”

 “오늘은 날 큰올케로 부르시네. 졸지에 시누올케사이가 되어버렸구나.”

날마다 맡겨지는 뒤바뀐 배역에도 훌륭히 연기해내는 어머니. 마릿골 고샅을 울려대는 태풍의 흔들림에 당신 몸을 기대신다.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며 함께 뒤섞이는 길을 자청하셨다.

이제 마릿골 소쩍새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 

고귀한 인내의 꽃 한 송이 피워내더니 거센 태풍의 기억은 까맣게 잊고 사신다.


 고통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어성전. 그 이름 뜻처럼 고기떼가 문전성시를 이룰 날도 멀지 않았으리라.

더불어 마릿골 내 어머니일상도 쉬지 않고 몰아치는 태풍 속이건만 유유히 흐른다.



*어성전 :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어성전리 마을

*마릿골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매류리 마을의 옛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