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14세 미만 아동의 SNS 계정 보유 금지 법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808

유뽕이 시리즈 113 - 딱따구리와 초록 뱀


BY 박예천 2013-04-26

 

       딱따구리와 초록 뱀



 

저녁을 먹고도 한참동안이나 유뽕이는 자기 방에서 나오질 않습니다.

항상 부산하게 움직이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녀석인데 오랜 시간 잠잠합니다.

이럴 땐 오히려 엄마가 불안해집니다.

뭔가 엉뚱한 짓 하고 있거나, 사고를 쳐놓고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거실에서 허리찜질 하다가 궁금함을 견디지 못하고 살금살금 유뽕이 곁으로 갑니다.

컴퓨터 화면은 부옇게 켜놓고 책상 위에서 뭔가를 그리는지 몰두해있네요.

한동안은 전철모형도를 프린트해서 오리고 붙이면서 놀았답니다.

집안 방바닥마다 철도라고 생각되었는지 자기가 만든 종이전철을 운전하고 다녔지요.

“이번 내리실 곳은 온수, 온수역입니다. 내리실문은 오른쪽입니다!”

예전 다녔던 전철역을 외우고는 혼잣말로 안내방송 합니다.

“지금 오금, 오금 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라고 진지하게 목소리를 가다듬노라면

엄마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옆에서 대꾸하지요.

“지금 오줌, 오줌 행 열차가 화장실로 가고 있습니다!”

틀린 단어를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유뽕입니다.

“오줌 아니야! 오금!”

엄마를 향해 마구 소리 지릅니다.

“히히히 알았어! 오금!”

또 새로운 열차 한 칸을 만드는 것인가 들여다보니 이번엔 열심히 뭔가에 색칠중입니다.

이따금씩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자기 그림과 비교분석까지 합니다.

색칠도구들이 들어있는 서랍 열고 한참동안 자신이 원하는 색깔을 고민하며 고르기도 합니다.

“유뽕이! 뭐 그리는 거야?"

“딱따구리요!”

과연 화면에 부리가 상징적으로 툭 튀어나와있는 딱따구리 한 마리가 있습니다.

“와! 이거랑 똑같이 그리는 거야? 다 그리면 엄마 보여줘!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리고는 조용히 거실로 나왔지요.

아들의 예술 활동(?)을 방해하는 몰지각한 엄마가 되기 싫으니까요.


거실 탁자위에 노트북 켜놓고 인터넷 쇼핑몰을 뒤적이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눈알이 빠져나갈 듯 쇼핑할 물건들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하얀 종이가 스윽 엄마 눈앞으로 들어옵니다.

어느새 다 완성한 그림을 엄마에게 내밀었던 겁니다.

그림을 들여다보다가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습니다.

 


 

색칠도 참 잘 했지만 옆에 있는 나무를 보는 순간, 가슴에 뜨거운 것이 밀려왔지요.

딱따구리만 그대로 베껴 그렸다면, 평소 하던 식으로 복사수준이구나 했을 겁니다.

헌데, 분명히 원본 그림에는 없던 초록 잎의 나무가 유뽕이 그림 속에 살아있습니다.

자기스스로 생각해서 나무를 심어놓은 겁니다. 딱따구리에게 어울릴만한 배경이니까요.

 

 


 

또 한 장 초록 뱀도 혀를 널름거리며 똬리 틀고 있습니다.

역시 뱀만 달랑 있던 그림인데, 위로 구름을 그리고 아랫부분엔 풀모양도 있네요.

유뽕이의 상상주머니가 아주조금씩이지만 채워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작년 한해.

서울로 한방치료 다니면서 엄마는 기적의 날을 꿈꾸며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녀석의 장애가 거짓말처럼 말끔히 치료되는 날이 올 것만 같았지요.

그러나 연말이 되기까지 아무런 변화 없는 일상에 지쳐갔고, 좌절하며 무너지려했습니다.

이런 엄마의 어리석음 한방에 날려버리듯, 유뽕이는 거대한 메시지를 안겨줍니다.

만약 예상했던 큰 기적이 찾아왔다면, 일생 딱 한번만 놀라고 말았을 겁니다.

좀 억지해석 같으나 유뽕이가 가져다주는 기적은 작지만 자주 발생(?)됩니다.

생각해보면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며 행복한 시간과 만나는 셈입니다.

아들이 건네주는 작은 감동들은 매번 기적과도 같은 무게였으니까요.


누가 이 기쁨의 가치를 알겠습니까?

딱따구리 옆에 겨우 나무 한그루 그려 넣은 것인데, 기적이라 이름붙이며 감동하네요.

하찮은 것에 들떠있는 어리석은 엄마라 해도 괜찮습니다.

모자란 아들 곁에서 모자란 엄마로 사는 것이,

영악한 세상이 주는 아픔보다 몇 배 더 행복하다는 것을 진즉에 알았으니까요.




2013년 4월 25일 밤

유뽕이 그림 보다가 감동한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