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왜 이럴까?
이상해졌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머릿속에
담아뒀던 기억들만큼은 지켜낼 자신이 있었건만...
그것이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작은 에피소드나 감동, 아픔들을 꼭 끌어안고 있다가
글자로 옮겨놓곤 하던, 내게 있어 취미같이 쉬운 일이
점점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작은 것을 크게 품고 힘겨워하던 나를 바꿔보려 애를
쓰던 지난날들이었다. 다른 곳에 마음을 두려 애썼지만
쉬이 고쳐지지 않는 집착의 번뇌 때문에 약을 먹지 않고는
잠들 수 없던 때가 비일비재 했던 날들을 뒤로 하고보니
오늘 날 부작용인지, 바보가 되어 버린양하다.
책을 읽고 이해하는 것들도 둔해져 버린 것을 느낀다.
끓어오르는 화들을 폭발시키고도 오랫동안 심중에 담고 있던
것들조차 이제 반짝, 그 순간 지나고 나면 금세 잊게 되었다.
(이 부분이 한편으론 감사하다.)
기억해야지, 했던 것들도 몇 초 사이에 까마귀 고기 열 댓 마리
잡아먹은 듯이 잊어버리기 일쑤다. 머릿속에 뇌가 모래로
바뀌어 버렸는지, 아니면 스펀지가 되어버렸나, 귀와 마음으로
담아놓은 모든 것들이 물로 변해 흡수되어 버리는 듯이 흔적이
없기 일쑤다.
어제만 해도 그랬다. 아영이에게 일주일에 2번은 도시락을 싸서
학원에 들려 보내곤 했는데 평소 일찍 끝나곤 했던 수요일에도
보충이 있어서 늦는다며 부리나케 학원으로 달려가던 아영이가
문 앞에서
“엄마 죄송하지만 간식 좀 챙겨서 가져다주세요.”하는
것이 아닌지. 계획에 없던 도시락을 싸기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전날이던지, 늦어도 등교하는 아침나절에 귀띔이라도
했더라면 미리 준비를 해놨을 터. 무슨 일이건 확인하고 미리
계획을 세워나야 한다고 부르짖던 제 엄마 볼 염치가 없는지
귀에 꽂힐 내 잔소리를 피해 달아나고만 딸아이 도시락을 만들기
위해 얼마동안 주방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난 후 숨 돌리며
집안을 둘러보니 정돈 되지 않은 집안 구석구석이 눈에 들어
왔다.
해피의 장난감들부터 읽고 있던 책이며 PT병과 팥빙수
빈 통들이 누가 작정하고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늘어져있었다.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아영이가 부탁한 간식을 전해주기로 한
오후 6시까지는 1시간가량 남아있었기에 크지 않은 집안,
정리하며 걸레질하기엔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손이 갔던
재활용할 PT병과 팥빙수 통을 보며 문득 나의 뇌기능을 단련하기
위한 테스트를 해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는 길에 재활용
망에 담아야지, 하는 다짐에 다짐을 하며 아영이 도시락을 담아놓은
작은 쇼핑백에 함께 담아놓게 되었다.
안방을 치울 때도 기억했다. 아빈이 방과 아영이 방을 걸레질 할 때
까지도 분명 기억했었다. 마지막으로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거실을
훔칠 때까지도 분명, 확실히, 결단코... 기억했었다. 조짐이 좋아서
쾌재까지 불렀드랬다.
‘아싸, 그래. 이 건망증이 불치병은 아닐 거야. 내가 그간 나사 하나
빠진 듯 어딘가 느슨해졌기에 기억창고 한편에 살짝 녹이 슬어서
그런 거지, 다시 바짝 긴장하고 살다보면 다시 원활한 기억력을
찾게 될 거라고... 암만...‘
자위하는 심정이 되어 다 쓴 걸레를 들고 욕실로 들어가서 헹궜다.
그리곤 귀찮은 두 일- 집안청소, 도시락 싸기-를 해치웠다는 후련함을
끌어안고 집밖을 나섰다......... 그런 내가 아영이를 만나서 쇼핑백을
전해 줄 때 좌절하며 한마디 했다.
“있지, PT병하고 팥빙수 빈 통, 학원 쓰레기통에 담아둬라. 엄마가
재활용 망에 담아 둔다는 것을 잊었지 뭐니...“
환갑이 훨씬 넘은 김 수현 작가는 영화시나리오에 다시 도전을
한다는데... 뿐인가? 팔순이 훨씬 지나서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기억력은 젊은 사람 여럿 뺨칠 정도였다. 아래층에 살고 계시는
살아생전 외할머니 또래와 비슷한 할머니께서도 꼬장꼬장한
성격과 몇 달 전 일을 방금 전 일처럼 일목요연하게 만난
자리에서 늘어놓곤 하셨다.
남편의 이해할 수 없는 성격과 무능함으로 속 끓이던 나날이
어느 순간부터 커가는 자식들의 미래를 걱정하며 탓하던 것을
모두 ‘내 탓이로소이다.’ 마음 가운데에 놓고 나니 의욕상실에
도달하던 것을 겨우 벗어나고 보니 불혹이 당장 코앞인 이 시점에서
환갑을 맞이해가는 부모님과 맞먹는 정신력과 쑤셔대는 삭신을
소유하고 말았다. 나날이 발전하는 것이라고는... 어허, 통제로소이다.
무르익어가는 이 가을에 내가 슬픈 것이 아직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낙엽들 통에 맨땅을 쓸쓸히 거닐고 있을 ‘시몬’을 찾는
오빠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