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었다. 내 맘이 좀체 벗어날 수 없는 어둠 속에
갇혀있던 것처럼 깜깜한 밤이었다.
믿기지 않던 끔찍한 생명체를 잔인하고 매정하게
떼버렸는데도... 난 아기에게서 훨훨 자유롭지 못했다
‘내가 전생에 뭔 죄를 그리 졌다고...’ 외할머니께선 들판의 잡초처럼
무성하게 피어나던 시련 앞에서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이셨다.
스탠드 불도 켜지 않고 어둠에 고스란히 묻힌 채로 침대에 누워있던
그 순간, 자꾸만 내 전생을 탓하고만 싶었다. 내 선택으로 죽어버린
내 뱃속에 자리 잡았던 아기에게 향한 죄책감으로 짙은 우울함에
빠져있었다.
팅... 팅...
며칠 전부터 밤마다 지난날처럼 사돈이 작은 알맹이로 내 창문을 향해서
던져대고 있었지만 난 계속 무시하고 있었다. 그와 다시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를 내 의식 속에서 완전히 떨쳐버리고 싶었다.
며칠 동안 민혁은 내 부탁대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고마웠다.
하지만 한 번씩 요란하고 고집스럽게 울려대던 수화기를 집어 들었을 때,
묵묵부답 말없이 주변의 시끄러운 잡음만이 내 귀를 두들기곤 하던
일이 가끔 있었다. 그럼 난 상대가 형이구나, 짐작하며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곤 했다.
병원에 다녀 온지 일주일쯤 됐을까,
엄마는 수원서 내려와 얼마 있지 않아 바닷가가 보이는 커다란 공터에다
포장을 치고 제대로 된 포장마차를 운영하셔서 나가 계셨고 아버지 역시
완공된 건물에 세입자들이 들어오며 관여해야할 일들 때문에 밖에서
시간을 보내실 때가 많았다. 나도 나갈 일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집에서 혼자 있을 때였다.
그런 어느 날 전화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접니다...”
“!!!”
사돈이었다. 그가 어떻게 우리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을까.
궁금할 새도 없었다. 놀란 나는 무작정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전화기가 또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그는 집에 내가 혼자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코드를 빼놓고 싶었지만 집으로 걸려오는
중요한 전화가 종종 있던 터라 그럴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역시나 굵직한, 그리고 독기서린
사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왜 몸이 달아서 전화까지 매수(?)하게 됐는지,
어찌하여 그 목소리에 바짝 약이 올라있는지, 나는 그 순간 짐작은 했다.
“애 뗬습니까?”
역시나 단도직입적이고 간단명료한 그였다.
“그럼, 정말 내가 애를 낳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난 그로인해서 경험하지 않아도 될 일을 경험했고 짓지 않아도
될 죄를 짓고 말았다. 나 역시 그에게 화가 나있던 차였다.
“내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고 했지요?!
“용서하지 않으면 어쩔 건대요? 해봐요. 어디, 나도 이제
겁나는 것 없다구!“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곧 요란하게 전화기가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그가 단념하기만 기다렸다. 한순간 내 인생에 뛰어든 그를 어떻게든
잊고 싶었다.
그날 오후 늦게, 해가 마을의 바닷가 수면까지 내려갔을 쯤,
유난히 수고를 많이 했던 전화기가 지치지도 않았는지 또 울려대고
있었다.
“여보세요...”
“응, 언니야... 큰일 났어.”
사돈 때문에 핑계를 대며 점점 격조하게 지내던 선영이 엄마, 사촌언니였다.
큰일... 사돈과 통화를 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불안했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좌불안석, 누군가에게 쫓기는 조급함까지 들면서 내가 왜 이러지?
좀체 알 수 없는 마음으로 붕 떠있었다. 언니의 큰일이란 말에 갑자기 사돈의
까무잡잡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곤... 왜?... 뱉을 수 없는 말로 내게 물었다.
“호떡집에 불났어? 웬 호들갑이야.”
심란한 마음을 떨치며 언니와 평소 주고받던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언니의 목소리는 근심이 가득했다.
“나 지금 읍내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 네가 선영이 좀 데리고
있을래?“
“누가 아파?”
“삼촌이 사고 났어.”
“!... 무...슨 사고...”
내려앉은 가슴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언니와 통화에 임해야 했다.
“몰라, 미치겠어. 현장도 아닌 곳에 왜 갔는지 선영이 아빠도 이해가
안 간다는 거야. XX리 그쪽엔 왜 갔을까? 거기서 전봇대를 들이받을게 뭐야...
술도 먹지 않았는데 말이야... 내가 제명에 못 살겠어.
지금 서의원에 입원해있다고 연락 와서 가봐야 해. 삼촌하고는 아직
통화도 못했고... 빨랑 네가 와줘라. 언니 나가보게...“
언니가 병원에 간 후, 선영이를 데리고 집에 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조카가 그 순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놀아달라고 찡얼거리는 어린 것이
한없이 귀찮기까지 했다.
어떻게 된 걸까? 많이 다쳤나?
크게 잘못되진 않았겠지? 그렇다면 큰 병원으로 갔을 거야...
왜... 그런 마을이 없는 막다른 산길로 갔을까?
내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버리고 만 걸까?
복잡한 심정의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밤이 늦도록 언니가 오지 않은 밤, 조카와 함께 내방에서 밤을
보냈다. 뜬눈으로 밤을 새다시피 했던 아침, 언니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집에 왔을 때 사돈의 상태가 어떤 지경인지 궁금증에 목이 바짝 마른
마음을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집에 돌아 온 것이 새벽녘이라서 선영이를 데려가지 못한 이유가
사돈 때문이 아니라 따로 또 볼 일이 있어서 였다며,
사고 난 차량의 앞부분이 심하게 망가진 것에 비해 사돈은 경미한 타박상
정도만 입은 것이 확인되어 엑스레이만 찍고 곧바로 퇴원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머리 뚜껑이 열리는 줄 알았다. 짜증 곱빼기로 나고 만 상태에서 언니에게
선영이가 간밤에 엄마 찾으며 떼를 써서 잠을 한숨도 잘 수 없었다며 거짓말로
신경질을 내고 말았다. 언니는 아침 댓바람부터 내게 잔뜩 깨친 채로 돌아갔다.
그날 낮에 창문을 통해서 몰래 훔쳐 본 사돈의 이마에 얼굴빛과 대조되는
하얀 붕대를 덧대어 반창고로 붙인 것이 보였다.
힘찬 걸음도 보였다. 다행이다... 안도했던 날 밤,
나는 평소보다 일찍 잠에 빠졌다. 험한 일을 짐작하지 못한 채로...
내가 왜 잠에서 깼는지 몰랐다. 깊은 잠에서 눈을 떴을 때 정신이 없었다.
누군가 내 입을 막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눈을 떴고 정신을 차렸을 때 검은 형체가 어스름하게 보였고, 뒤늦게 놀라고
말았다.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억센 손이 내 코와 입을 막았고 간간히
배려하듯 숨통을 튀어주며 그가 고개를 연실 좌우로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에게서 기억에 있는 냄새가 풍겼다. 연한 화장품 냄새...사돈이었다.
어떻게 들어왔을까? 늘 철저하게 문단속을 하셨던 부모님이셨는데...
자석에 모여드는 쇳가루처럼, ‘사돈’이란 존재는 내게 몸과 머릿속에 근접만
했다하면 나로하여금 온갖 상념 걱정거리들을 끌어 모으게 했다.
그렇게 어이없게 난 또 사돈에게 몸을 뺏기고 말았다.
부모님이 계시는 집안... 내 방에서...
쉽게 벗겨 내려진 아랫도리, 벌려진 음부...나는 창녀였다. 그 순간.
사창가의 여자처럼 쉽게 부끄러운 그곳을 벌리고 말았으니... 창녀였다.
내 생각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쩜 그가 날 그리 여기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손으로 내 얼굴의 일부를 막고 교묘하게 내 숨구멍을 튀어주며
익숙하게 제 물건을, 졸지에 쉬운 구멍으로 치부된 내 질구로 서슴없이
피스톤운동을 해댈 때, 난 죽은 듯이 조용히 있었다. 그가 손으로 내 입을
막는 수고를 덜어도 나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 꼴로 발각되면 어쩌나, 불안했던 머저리였으니까.
(살아보니 남자로써 지녀야 할 배짱을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인간이 당시에 어찌하여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던 건지, 오히려
살다보니 놀라울 따름이다.)
네가 뛰어봐야 벼룩이다, 네가 날고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에
손오공에 지나지 않아!
비아냥거리듯...
부르르 그가 몸을 떨자 내 몸 안에서 뜨거운 것이 느껴졌고
벗겨진 살갗에 소금기가 닿은 것처럼 쓰라렸다. 그의 정자를
또 받아들이고 말았구나, 짐작하며 이렇다 말 한마디 없이
허겁지겁 창문을 넘고 나가는 그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그때서야 고정된 내방 창문의 방충망에 구멍이 커다랗게 안으로
휘어져 들어온 것이 보였다.
1층이지만 2층에 가까운 내방 창문, 그 높다란 담벼락을 타고
그가 들어왔던 것이다. 문을 닫기만 했지 잠그지 않았으니
이 꼴이 된 것이 또 내 잘못인가?
다시 임신이 될까봐, 난 부리나케 화장실로 들어가서 마렵지 않은
오줌을 누기 위해 힘을 줬다. 그리고 샤워기를 틀어서 여러번 반복해서
그곳을 닦고 또 닦아냈다.
용서치 않겠다고 경고했던 것이 또다시 날 덮치는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가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안겨주는 거지? 또 다시 애가 생기면 어째...
내 머리가 진정 미쳐가고 있는 건지, 끓는 분노보다 그런 걱정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화냥년이었니?’ 차마 입 밖으로 뱉을 수 없던 또 다른
내게 향한 말을 하고 있었다.
나쁜 놈이었다. 사돈은...
남이 내가 겪은 일을 내게 해준다면, 아니 이런 일을 영화나 드라마로
본다면,
“저런 놈, 콱, 경찰에 신고하지!”
“그런 놈, 그딴 짓거리 못하게 그 물건 콱 요절을 내버리지!”
내 입으로 하고도 남을 얘기들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내 일이 되고 보니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돈에게 질질 끌려가면서도
모질지 못한 나만 등신 같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난 그날 이후부터 밤마다 창문을 잠그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시 불안한 심정으로 ‘혹시...’하는 걱정을 안고서...
취미를 살려 주업삼아 살고 싶던 나는 작은아버지의 소개로
영등포에 위치한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도입 된지
얼마 안됐다는, 나조차도 생소했던 왁스세공은 초록색의 직사각형
모양의 비누나 초 같기도 한 재질로 원형 틀을 깎아내어 대량으로 찍어
낼 수 있다는 악세사리 세공 법이었다. 디자인 공부를 위해 데생도 함께
시작했다. 새로운 나를 만들기 위해 그리고 세상을 향한 도약을 위해
학원에 전념했다. 몸이 피곤은 했지만 그런대로 적성도 맞았고 함께 수업을
받던 비슷한 또래들과 어울리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