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637

선영이 삼촌(10) - 내가 사업가?


BY 솔바람소리 2008-12-02

사랑스런 조카 선영이를 보러가던 중간에서 심기가 틀어져버린 나의

발걸음엔 잔뜩 신경질이 묻어있었다. 문을 열어 재끼는 손길도 역시...

거실에서 TV를 보던 언니는 갑작스러우면서도 과격한 문 열림에

소스라친 모습으로 그렇잖아도 왕방울같은 눈이 더 동그래져서 들어서는

날 바라보았다.

 

“야! 애 떨어지겠다.”

“벌써 둘째 갖았어?!”

“아니... 그만큼 깜짝 놀랐다는 말이지, 기집애...

그렇지 않아도 너한테 연락하려던 참이었어.“

“왜!”

“어쩜 좋으냐, 삼촌 중에 한명이 상사병에 거렸다지 뭐니.

자꾸만 네가 눈에 아른거려서 잠을 못 잤다나봐. 꿈까지

꾸고... 난리가 아니었다더라. 그래서 밤마다 선영이 삼촌이

널 불렀던 거래.“

 

오면서 겪었던 일을 어떻게 꺼내야 하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었지만 불쾌한 기분이 가라앉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쩐다고.”

“뭘 어째. 이모, 이모부 알면 누구 죽을 일 있냐? 서울로 올라가라고

말했어. 넌 함부로 볼 수 없는 애라고... 코가 닷자는 빠져서 알았다고

하더라. 오늘이나 내일쯤 올라 갈 거야... 그런데 웃기지...

너처럼 성질 더러운 애가 뭐가 좋다고...하여튼 남자들 심리란 희한해...“

 

(나도 웃겼어. 나도 엄연히 여잔데 말이야, 괜찮은 나비가 날아와야

내가 꽃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게 아니겠냐고... 이건 파리들만 득실거리니

내가 그럼 똥이야 뭐야? 참말...기분 더러워서...)

 

불청객 중에 한명이 떠난다니 나야 환영할 일이었다.

하지만 한번 꼴린 마음이 그리 쉽게 풀릴 리가 없었다.

 

“난, 선영이 삼촌도 기분 나빠. 중간에서 다리 놔줄 게 따로 있지.

어쩜 그렇게 생각 없이 행동해? 자기가 뭐 이몽룡의 방자야 뭐야?“

“ㅎ ㅎ ㅎ...그러게, 말이 또 그렇게 되냐? 방자...하여튼

표현도 적절해. 뭐야 그럼... 니가 춘향이냐? ”

 

그 일이 있은 후 선영이 삼촌과 함께 있던 친구 하나가 먼저 서울로

올라가고 나머지 한명도 머지않아 마을을 떠나갔다. 친구 둘이

떠나고 혼자 남게 된 선영이 삼촌은 한동안 풀이 죽은 듯 보이기도 했다.

 

취직을 하겠다며 시시때때로 떼를 쓰는 나 때문에 부모님은 겉으로는

별다른 말이 없으셨지만 고민을 하고 계셨던 것 같다.

어느 날 내게 뜬금없이 가게를 차려주면 해보겠느냐고 물으셨다.

수원쯤에 있는 부곡에 아담한 팬시점 자리가 났다면서 그곳엔

살림도 함께 할 수 있는 방도 딸려 있다고 하셨다.

잠시 생각을 해보겠다고 했다. 하루정도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밥을 혼자 해먹을 수 있을까?... 하면 하겠지... 못할게 뭐겠어...

내가 곱상하게 포장을 할 수 있을까?... 얼마간은 하던 사람이

봐준다고 했으니까 배우면 되겠지...

만약에 망하면?... 손익계산 철저히 해서 하락 선을 탔다싶으면

지체 없이 문 닫으면 될 거야.

 

시답잖은 몇 안 되는 고민들을 곱씹다가 내린 결론은 OK였다.

사업보다는 목마른 ‘자유’ 와 할 일 없던 백수탈출에만 비중을

뒀던 당시에 철부지였던 난 친구들을 불러들여 함께 지내야겠다는

얄팍한 계산만 하고 있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아버지 못지

않은 성질의 난 갑자기 마음이 급해져서 빨리 가겠다며 서둘렀다.

팬시점에 대한 연락을 주셨던 작은 외숙모에게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그리고 엄마는 길목이 좋은 그곳을 벌써 다른 사람이 인수를 했다는

내게 있어 천청벽력(?)같은 소식을 바로 전해주셨다.

잔뜩 바람이 들어갔다 빠져버린 풍선 같은...

상실감에 빠진 나에게 엄마는 도심에 살고 있는 외갓집 식구들에게

운을 떼어났으니까 기다려 보라고 하셨다. 당시에 부모님께서도 20년이

넘도록 배를 타셨던 어업을 서해대교 건립이 확정되며 중단하셨을 때였다.

보상금과 그동안 수중에 갖고 있던 돈으로 멀지 않은 곳에 땅을 사고

7층짜리 상가건물을 짓고 계실 때이기도 했다. 그 건물이 제법 올라갈 쯤

아버지는 내게 한 층을 주시겠다고 했지만 나는 촌구석에서 있기 싫다며

거절했다.

 

팬시점이 날아(?)가 버리고 머지않아 수원 북문에서 제과점을

하시던 셋째 이모에게 연락이 왔다.

슈퍼마켓 자리가 났다나?... 거기도 길목이 좋다고 했다.

한번 놓친 경험이 있던 난 무턱대고 해보겠다고 했다.

큰 꿈을 안고 그곳을 엄마와 찾아가던 날... 난 김이 제대로

세고 말았다.

슈퍼보다는 작고 구멍가게라고 하기에는 큰... 어중간한 식료품

가게라고 해야 하나...

그곳에서 사업가(^^)의 꿈을 키워보겠다며 어쨌든 올라오던 날,

나 혼자는 안됀다시며 엄마가 따라 오셨다.

그곳에서 내가 버틴 것이 6개월가량이었지 싶다. 그 기간에

모든 것이 잘못 되어 버릴 줄을...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간판이 흔하디흔한 <희망슈퍼>였다.

그곳에서 새벽 별보기 운동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두부와 콩나물을

팔기 위해 새벽 6시전에는 개점을 해야 했고 유흥업소에서

가져가는 양주를 비롯한 주류를 팔기 위해 새벽 2시를 기다렸다가

폐점을 해야만 했다. 밑반찬들부터 아이들 과자쪼가리하며, 고무줄부터

화투장에 이르기까지... 만물상이 따로 없던 그곳에서 이틀을 버티고

나는 그만 두 손을 들어버리고 말았다.

바다에서 큰돈만 만졌던 엄마도 10원부터 아무리 비싼

물건을 팔아봐야 이익이 천원을 넘기 힘든 짜잘한 벌이의

그 일이 기 막하기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렇다고 애들

장난도 아니고 쉽게 그만 둘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하셨다.

죽어도 못하겠다는 나를 달래서 해결법을 찾은 것이

아버지와의 교대였다. 엄마는 식사 때문에 그곳을 지켜야

했고 중학생인 막내가 있는 시골집도 비울 수가 없어서 누군가가

있어야만 했다.

내가 집으로 내려가는 날 아버지가 수원으로 올라가셨다.

잘난 딸 덕에 졸지에 두 집살이를 하게 되신 부모님이 되셨다.

 

내가 슈퍼에 있다고 해서 전혀 도움 되는 일은 없었다. 술 취한

사람들이 꼬장을 부리며 술을 찾을 때면 안 판다며 쫓아냈다.

학생 놈들이 담배를 찾으면 욕이나 된통 해대며 쫓아댔다.

유흥업소의 사장이 한 달이 넘도록 외상값을 안주면 쫓아가서

어쩌든지 받아내곤 했다.

때론 학원에서 공부하던 아이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중간에

스리 슬쩍을 행하는 학생을 잡아서 족치고 지난날의 나를 떠올리며

관대(?)한 마음으로 그 아이가 훔쳤던 초코릿을 박스째

집어주며 몇 마디 조언들을 늘어놓고 돌며 보내기도 했다.

엄마는 나보고 집에서 쉬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었다...

 

날이 쌀쌀하던 겨울의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수원에서 내려오던 길에 읍내에서 시간을 보내고

동생의 하교시간에 맞춰서 집으로 귀가하는데 집안에 냉기가

돌았다. 보일러 눈금의 온도는 높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동생도 춥다며 침대 위에서 오들거리며 떨었다.

나는 언니에게 전화해서 보일러가 고장 난 것 같다며 형부 좀 보내달라고

했다. 수화기 넘어 잔뜩 심기가 틀어져버린 언니는 형부가 또

사냥을 나갔다며 내게 조금만 기다려 보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쯤 시간이 지나서 인터폰 소리가 났다.

형부라고 생각하며 대문을 열어보니 선영이 삼촌이 서있었다.

어정쩡한 모습의 사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