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산이 열리고 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목엔 개나리 벚꽃 진달래 목련…… 날마다 봄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다. 바람에 꽃잎이 하르르~ 날린다.
아! 짧은 외마디를 지르고는 감탄사를 뱉은 입술을 다물지도 못하겠다. 미처 다물지 못한 입술사이로 차고 싸한 바람이 들어와 박하사탕을 먹은 것처럼 입안이 환해진다. 산의 길목이 환하게 보이다 못해 황홀한 것은 봄 풍경이 깊어지는 것만큼 마음도 깊어지기 때문이지 싶다. 깊어진 마음에게 봄의 나날을 잘 견디어 내자고 가만히 말해둔다.
봄이 빠른 속도로 찾아오니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하루, 이틀…… 여러 날이다. 저녁을 지으려다 내다 본 창가엔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진다. 불빛 아래서 하얗게 살랑살랑 흔들리는 겹 벚꽃나뭇잎이 어쩌면 지하철을 내려 계단을 올라 세상 밖으로 나서는 순간의 어리둥절함으로 다가온다. 차 한 잔을 들고 서 있다 보니……. 어느새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어 있다.
태연하게 봄날을 맞이하고 있다가도 가끔 삶의 해답을 찾아낼 수가 없는 물음들이 가슴을 메울 때가 있다. 그리운 이의 웃음이 목에 걸리는 사레로 남고, 친구의 의미 없는 투정이 집에 돌아와서까지 잊히지 않고, 버스 옆자리에 앉았던 낯선 남자의 그늘진 눈 그림자가 자꾸 떠오르는 그런 날이면 나는 내 모든 것을 안으로 품어 주는 산으로 간다.
산의 초입에 들어서면서부터 우~하고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불러 본다. 노래 소리는 여러 겹으로 퍼졌다가 다시 내 귀로 돌아온다. 산에서 흩어졌다 다시 돌아 온 여러 겹의 소리는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아직껏 이루어내지 못한 문신文神을 향한 아쉬움과 그리움의 아우성이다.
마음속의 소리들을 뭉쳐 가슴에 눌러 둔 채로 산속의 저수지에 이르렀다. 저수지 깊은 물속을 들여다보니 봄 산이 하나 가득 담겨있다. 물속에 비치는 내 그림자를 보고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선다. 저수지에 비치는 산 그림자 곁에 봄날 매일 불면에 시달리는 여윈 얼굴 하나가 깊은 물속에서 허우적댄다.
아쉬움이라는 말과, 그리움이라는 말, 보고 싶다는 말까지도, 고독이라는 말의 곁에 붙어서 저수지 바닥으로 내려 꼿히려 하고 있다. 이런 알량한 단어들은 저수지 깊은 바닥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 만이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내가 숱하게 생각했던 이런 것들이 나를 얼마나 하찮은 사람인가하고 비웃는 듯하다.
물속에 비칠 얼굴 하나 때문에 놀라하는 나 따위가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니지 싶다. 옷깃을 여미어도 바람이 다 막아지지 않고, 물결이 아무리 거칠어져도 저수지 깊은 물속바닥을 다 감추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나를 어찌하지 못한다.
산은 날마다 화려해지고 불면不眠의 밤은 깊어만 지고 또 다른 밤은 빠르게 찾아오는데 새벽은 더디게 찾아와 나는 고통스럽다.
겨울과 봄의 경계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또 봄…… 을 넘기면서 무디어진 자신을 달구고 두드려야 했고 수십 번의 담금질을 해 두었어야 했다.
불면의 끝에 만나는 새벽은 언제나 날카롭다.
현실과 이상 사이, 진실과 허위 사이, 욕망과 이성 사이, 설렘과 무료함 사이, 허기와 포만감 사이…… 이런 모든 경계를 어쩌지 못하고 불면의 끝에 만나는 밤과 새벽 사이에서 나는 가슴이 베일 듯 아프다.
나무들이 새 잎을 밀어내는 봄․봄․봄, 일 년에 한 번씩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봄……. 나도 나무처럼 다 열어 보이지 못해 쌓아두었던 마음속의 말들을 새 움 속에 가두었다가 봄이면 그 마음들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고 싶었다. 이런 상상만으로도 행복했었는데…… 다 어디로 날아갔을까.
봄이 달려오는 속도를 가늠하지 못하겠다.
봄이 오고 있다. 아니, 벌써 봄이 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