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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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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숲에서


BY 써머스비 2008-09-16

                      

 

                                          갈대 숲에서

 

   시험을 마친 일요일, 우리는 길을 떠났다. 영화 JSA(공동경비구역)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서천군 갈대밭으로 시험을 끝낸 스스로를 위로하자는 취지에서 이었다. 나들이의 시작은 유성문화원에 들르는 것이었다. 일행의 딸이 사진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주제는 '바다'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바다로 우리의 마음은 벌써 한껏 열려있었다.  

  도시를 벗어나자 햇살은 따가웠고 들판은 온통 금빛으로 눈이 부셨다. 나지막한 산에서 반짝이는 은빛 억새와 주황빛 고운 감이 아니라면 여름이라 해도 좋을 날씨였다.

  갈대밭이 내려다보이는 둑길엔 자동차가 가득했다.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뚝방 길에서 날리는 흙먼지가 메케했다. 가을 가뭄이라 할 만큼 여름 장마를 끝으로 비가 오지 않았고 우리도 시험 준비로 속내가 바짝 말라 있던 차였다.

  드넓은 갈대밭 끝으로 아스라이 강물이 눈에 들어오자 금방 가슴이 촉촉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갈대밭 입구에는 커다란 장승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장승보다 키가 큰 갈대를 등에 지고 기념촬영을 하면서 오는 길에 봤던 억새와 갈대의 차이를 확실하게 알게 됐다. 나무와 들풀의 이름을 많이 알고 있는 일행의 덕분이었다.

 억새는 주로 산자락이나 들에서 볼 수 있는데 하얗게 펴 흔들릴 때면 솜털이 보송보송한 연약한 소녀의 이미지였다. 그에 비해 갈대는 건강하고 씩씩하다. 강가나 습지에 많고 커다란 키에 대나무처럼 마디가 있다. 튼튼한 몸으로 군락을 이룬 모습은 사열중인 군인 같아서 지휘관이라도 된 기분으로 걷는다. 갈대 이삭이 바람에 살랑거리니 어디선가 행진곡이라도 들려올 것 같았다.

  갈대밭은 향기로운 미로였다. 시가 있는 길, 다정한 연인들의 속삭임이 있는 길, 통나무다리가 놓인 길, 노부부의 편안함이 묻어있는 길, 어떤 길을 가도 나름의 멋이 있었다. 갈대는 도란거리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들려주었다.

  햇살과 바람과 갈대의 수런거림을 들으며 흔들다리에 올라섰다. 밧줄을 꽉 잡고 체중을 실어 흔들다리를 아이처럼 굴러 봤다. 일행들의 웃음소리가 갈대숲에 울려 퍼진다. 아마 그쯤이었을 것이다. 그 소리를 듣게 된 것이.

 웃음소리 끝에 따라온 그 소리는 청승맞다거나, 무섭다거나, 슬프다거나, 기분 나쁘다거나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회심곡처럼 구성지고 아늑하여 들뜬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게 하는 것은 확실하였다. 우리는 소리를 찾아 강 쪽으로 갔다. 거기 바다 같은 강이 멈춘 듯이 흐르고 있었다. 그 소리는 강 따라 들려오는 상여소리였다. 갈대로 지붕을 올린 오두막에 앉아 잠시 상여소리를 들어본다. 강가의 버드나무는 천리를 달려 숨을 고르는 강물을 들여다보고  나는 나를 들여다본다. 파란 하늘과 하얀 강을 이어주는 구름다리가 있는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상여가를 듣노라니 나는 지금 어디 있는가, 우리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강물이 반짝인다. 강 건너에는 부드러운 능선이 구름처럼 흐르고 있다. 이 순간 비라도 촉촉이 내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피어오르는 물안개로 몽환적 분위기가 돼 우리는 마음까지 젖어 여기서 일어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갈대는 흙과 물의 경계에서 흔들린다. 우리들도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흔들리고....... 그저 가을의 정취로만 바라보던 갈대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머잖아 겨울이 오면 철새들의 보금자리가 될 것이고 뿌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염물질을 걸려주는 필터가 될 것이다. 나도 갈대의 필터처럼 자정능력을 갖춰 언제나 향기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돌아오는 길, 노을이 내리고 있었다. 저기 산 아래에서 밭둑에서 이우는 저녁햇살에 투명한 감이 사월 초파일 연등처럼 온화하다. 

 

 멀리 금강 하굿둑에는 바다와 강이 공동경비를 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