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어머니
소학교 석달 열흘이 학력의 전부이지만, 모든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셨고, 자녀들과의 대화에도 못 알아듣는 것이 없을 정도로 명석하셨다.
그 당시 어려운 시 절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삼년 동안은 대소변을 받아내셨고 겨울에는 물웅덩이의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해가며, 극진히 모셔서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네사람들로부터 '효부효자'라는 칭찬을 들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결혼을 해서 엄마가 되어서 읽게된 책 중에 아 이들은 부모가 믿는 만큼 자라준다는 내용이다. 나의 어머니도나를 믿고 지켜봐 주셨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하지 않고 취업을 했을 때도, 다시 뒤늦게 주경야독하며 입시공부할 때도, 이른 아침 출근하여 직장을 다니며, 밤에는 야간대학에 들어갔을 때에도, 밤늦도록 공부하다가 밤 열한시에 귀가하 는, 몇 년 동안이나 어머니는 버스정거장에 하루도 빠짐없이 마중을 나오셨다. 내가 대학을 들어갈 무렵 어머니는 이미 환갑의나이셨지만 막내딸을 위하여 새벽밥을 짓는 일을 멈추지 못하셨다.
내가 결혼하겠다고 가난한집의 장남을 소개했을 때도 엄마는 나를 믿어주셨다. 공부하는 남편과 결혼했을 때, 산동네의 단칸방에서 신접살림을 차렸고, 임신한 몸으로 직장을 다닐 때, 첫딸을 출산했을 때에도 내 어머니는 내 옆에서 묵묵히 미소로 격려해주셨고 딸을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으셨다.. 아기를 돌보느라 밤잠을 설칠까봐 외손녀 딸을 손수 데리고 주무셨다. 밤에 우리 딸이 깨어서 칭얼거릴때마다 아기를 안고 기도하셨다.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하냐고 말씀하셨다.
한번은 손녀딸을 업고 저녁 무렵에 찬거리를 사러 나가시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서 넘어지셨다. 손녀딸을 다치지 않게 하시려고 하시다 당신은 이마에 주먹만한 혹이 나왔다. 어머니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너무 놀랐다.
혹이 갈아않으면서 그 피멍이 눈두덩으로 내려와 한동안 어머니의 얼굴은 자줏빛이어서 나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노구에 막내딸의 아기를 보시느라 지치셔서 큰 병을 얻으시기도 했다. 그러나 막내사위가 박사학위를 받고 성공하는 것, 막내딸이 집을 장만하는 것을 보기를 소원하셨다. 사년후 내가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에 어머니는 손수 보약을 지어오셨고 내가
빨간줄이 수없이 쳐진 어머니 의 낡은 성경책, 새벽밥을 지을 때마다 부엌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홀로 드리는 수많은 기도들이 어머니의 지혜의 근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어머니는 16세에 결혼하여 시부모님을 모시고, 칠남매를 흠없이 키우셨고,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계신 십년간 순종적으로 수발을 하여 변함 없는 부부애를 보여주셨다. 나의 아버지는 팔십까지 수를 누리시다가 소천하신지 삼년이 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매우 허전해하셨다. 북에서 형제자매를 두고 월남하여 친척이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북에 있는 동생들을 무척이나 보고 싶어하셨다.
내가 사십이 넘은나이에 뒤늦게 공부하려고 만학의 길에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때
당신의 노후의 삶이 혹시나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봐 어느날 갑자기 죽기를 소원하셨고 기도해오셨다. 깨끗하게 온천욕을 하시고 맛있는 저녁을 드신 후 어머니 표현을 빌리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만주 땅에서 결혼하셨고, 해방이후 이남으로 내려오 셔서, 육이오 전쟁과 피난살이의 어려움을 겪으신 내 어머니의 삶은 정말 수많은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의 삶을 글로 써보고 싶었는데. 어머니는 당신의 삶의 이야기를 다 들려 주시지도 않은 채,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버리셨다. 새로운이천년을 맞이하신지 팔일만에 칠십팔세의 생을 마감하셨다. 돌아가시면서 까지도 어머니는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하신 것 같다.
나의 아이들을 믿어 주리라. 격려하리라. 기도해 주리라 다짐해본다. 나의 어머니가 하셨던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