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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로 부르는 나의 어머니!


BY 강원아줌마 2008-07-04

나의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에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나셨다.

황주는 사과가 많은 고장이라 바람이 불면, 과수원에서 사과를

한 바구니씩 주워올 수 있는 곳이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어린시절은 기독교가 이북에서 전파되기 시작할 무렵

인 것 같다. 나의 어머니의 학력은 소학교 석달이 전부이다.

소학교에서 배운 한글을 잊지 않으려고 부엌에서 불을 지피면 서 까맣게 그을을 숯 부지깽이로 " 가 갸 거 겨 가에다 ㄱ을 더하면 각" 을 외우시며 부엌바닥에 글을 써보시곤 하셨다.

당신의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주일마다 주일학교에 열심히 참석하셨다.

 소학교 석달 열흘이 학력의 전부이지만, 모든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셨고, 자녀들과의 대화에도 못 알아듣는 것이 없을 정도로 명석하셨다.

주일학교에서 성경말씀을 열심히 암송하셔서인지 참으로 매사에 지혜로우셨다.



어머니는 일제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꽃다운 십육세에 결혼을 하셨고 이십 전에 이미 딸 하나에 아들하나를 두셨다. 시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하셨다. 막내인 내가 초등3학년이 될 때까지 무려 삼십년이상 부모님을 모시고 사셨다.

 

 그 당시 어려운 시 절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삼년 동안은 대소변을 받아내셨고

 겨울에는 물웅덩이의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해가며, 극진히 모셔서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네사람들로부터 '효부효자'라는 칭찬을 들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어린시절에 최대의 고민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한가지
는 '엄마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할까? '라는 고민이고, 다른 한가지는'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할까' 라는 고민이었다. 내가 어 린 나이에 이런 고민을 하게된 것은 어머니의 나이가 삼십팔세에 늦둥이로 태어났고 전쟁을 경험하신 이야기를 자주 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어린시절에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유별났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가 안보이면 온 동네를 찾아헤메서 꼭 엄마를 만나야 직성이 풀렸다.
엄마가 안 계시면 허전했고. 시장갈 때는 물론 어디든지 꼭 따 라다녔다. 밤에 잘 때도 꼭 엄마 옆에서 붙어서 잤고 엄마가 혹시 뒤로 돌아누우시면 섭섭해서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나는 성장과정이 아주 우수한 편은 아닌데도, 어머니는 나의 좋은 점을인정하고 칭찬해주셨다. 나를 못마땅해 하시는 말씀을 들은 기억이 거의 없다.

 

내가 결혼을 해서 엄마가 되어서 읽게된 책 중에
기억이 나는 것은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이라는 책이다 .

 아 이들은 부모가 믿는 만큼 자라준다는 내용이다.

나의 어머니도나를 믿고 지켜봐 주셨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하지 않고 취업을 했을 때도, 다시 뒤늦게 주경야독하며 입시공부할 때도, 이른 아침 출근하여 직장을 다니며, 밤에는 야간대학에 들어갔을 때에도, 밤늦도록 공부하다가 밤 열한시에 귀가하 는, 몇 년 동안이나 어머니는 버스정거장에 하루도 빠짐없이 마중을 나오셨다. 내가 대학을 들어갈 무렵 어머니는 이미 환갑의나이셨지만 막내딸을 위하여 새벽밥을 짓는 일을 멈추지 못하셨다.

 

내가 결혼하겠다고 가난한집의 장남을 소개했을 때도 엄마는 나를 믿어주셨다.

공부하는 남편과 결혼했을 때, 산동네의 단칸방에서 신접살림을 차렸고, 임신한 몸으로 직장을 다닐 때, 첫딸을 출산했을 때에도 내 어머니는 내 옆에서 묵묵히 미소로 격려해주셨고 딸을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으셨다..

아이를 낳고, 직장에 다니는 막내딸의 건강을 염려하여, 아기를돌봐주셨다.

 아기를 돌보느라 밤잠을 설칠까봐 외손녀 딸을 손수 데리고 주무셨다.

 밤에 우리 딸이 깨어서 칭얼거릴때마다 아기를 안고 기도하셨다.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하냐고 말씀하셨다.

 

한번은 손녀딸을 업고 저녁 무렵에 찬거리를 사러 나가시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서 넘어지셨다. 손녀딸을 다치지 않게 하시려고 하시다 당신은 이마에 주먹만한 혹이 나왔다. 어머니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너무 놀랐다.

 

혹이 갈아않으면서 그 피멍이 눈두덩으로 내려와 한동안 어머니의 얼굴은 자줏빛이어서 나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노구에 막내딸의 아기를 보시느라 지치셔서 큰 병을 얻으시기도 했다.

그러나 막내사위가 박사학위를 받고 성공하는 것, 막내딸이 집을 장만하는 것을 보기를 소원하셨다. 사년후 내가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에 어머니는 손수 보약을 지어오셨고 내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해주셨다. 어머니의 예언대로 아들을 낳았을 때 어머니는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어머니가 믿고 격려해주신 만큼, 어머니의 기도덕분에 막내사위가 공부를 마쳤고좋은 직장을 갖게 되었다. 마침내 우리가 근검절약하여 집을 장만했을 때에도 정말 기뻐해 주셨다.   모든일마다 '왜 그렇게 했니?' 라는 말씀한번 안 하시고 딸을 전폭적으로 믿어주신 어머니의 믿음과 격려는 나의 삶에 큰 힘이 되었다.


어머니가 가시는 곳마다 모든 사람들은 어머니를 좋아하셨다.
어머니께서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자요, 사람들 사이의 화 해자요, 상담가의 역할을 실천하신 분이다. 내가 존경하는 목회 사역자의 말씀이 기억난다. 성도들 중에서 보면 상당한 지식과 학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많은 인격의 소유자가 있다. 반면에, 어떤분은 국민학교 학력이 전부인 젊은여성인데 인 간관계나 매사의 일을 처리하고,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경우에알맞고, 지혜로운지 다른 사람에게 위로와 유익을 끼친다고 한

다. 그 사역자의 감탄을 금치 못하는 말씀을 들으며, 내 어머니

도 그런 분이셨노라고, 생각했다.

 빨간줄이 수없이 쳐진 어머니 의 낡은 성경책,

 새벽밥을 지을 때마다 부엌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홀로 드리는 수많은 기도들이 어머니의 지혜의 근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어머니는 16세에 결혼하여 시부모님을 모시고, 칠남매를 흠없이 키우셨고,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계신 십년간 순종적으로 수발을 하여 변함 없는 부부애를 보여주셨다.

 나의 아버지는 팔십까지 수를 누리시다가 소천하신지 삼년이 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매우 허전해하셨다. 북에서 형제자매를 두고 월남하여 친척이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북에 있는 동생들을 무척이나 보고 싶어하셨다.

 

내가 사십이 넘은나이에 뒤늦게 공부하려고  만학의 길에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때
에 처음으로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즞쯪 .. 아이들이나

잘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 잘하지 그 나이에 무슨 공부..." 말씀 은 그렇게 하셨지만 어머니가 나를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하신 것을 믿는다.

올해 일월팔일 토요일저녁이었다. 우리가족은 모두 온천에 가서 목욕을 하고 집에 와서 "아이 개운해"를 외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니가 온천목욕을 하시고 오는 도중에 교통사고가 났고, 어머니는 뇌충격으로 현장에서 병원으로 옮기시는 도중 소천 하셨다. 당신은 생전에 누구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셨다.

 

 당신의 노후의 삶이 혹시나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봐 어느날 갑자기 죽기를 소원하셨고 기도해오셨다. 깨끗하게 온천욕을 하시고 맛있는 저녁을 드신 후 어머니 표현을 빌리

자면 "어느날 딸깍 죽어야 할텐데"하신대로 정말  돌아가 버 리셨다. 당신의 하실 일을 완벽하게 하시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손수 일을 하셨고 바로 전날까지 교회에 출석하셨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만주 땅에서 결혼하셨고, 해방이후 이남으로 내려오 셔서, 육이오 전쟁과 피난살이의 어려움을 겪으신 내 어머니의 삶은 정말 수많은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의 삶을 글로 써보고 싶었는데. 어머니는 당신의 삶의 이야기를 다 들려 주시지도 않은 채,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버리셨다. 새로운이천년을 맞이하신지 팔일만에 칠십팔세의 생을 마감하셨다. 돌아가시면서 까지도 어머니는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하신 것 같다.

당신죽음의 댓가로 칠 남매의 가정에 손자들 학자금을 마련해주셨다. 막내딸의 마지막 두학기분의 등록금을 내 손에도 남기신채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셨다.

어머니가 안 계신 지금도 자연의 섭리는 변함이 없다. 가을은 여 전히 시리도록 아름답다. 낙엽마다의 빛깔 속에 어머니의 사랑과 격려, 믿음들을 그리움으로 물들여본다.

 

나의 아이들을 믿어 주리라. 격려하리라. 기도해 주리라 다짐해본다.

나의 어머니가 하셨던 것처럼....

그전에 다른아이디로 올려졌던 글을 제아이디로 통일해서 다시 올려봅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