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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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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어머니 친정어머니


BY 휘림 2007-10-22

 

아마 이 땅에 사는 많은 기혼여성들이 듣기만 하여도 눈물을 글썽이게 되는 단어가 “친정어머니”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전 그“친정어머니”란 말만 듣게 되면 자다가도 소스라쳐 일어나 몸을 떨곤 하지요.

 허긴 삼십대 중반에 경제활동을 접으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오랜 시간 가족의 의식주를 혼자 해결하셔야 했던 어머니고 보니, 전쟁터에 나가는 심정으로 매일을 살아내셔야 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어머니의 일대기를 잠시 돌아보자면, 16세 어린 나이에 뭍 나들이하며 海女일로 친정오라비 학비와 집안 경제를 도우다가 갓 스물에 대학생이던 아버지를 만나 결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집이라고 들어가 보니 눈자위에 하얀 막이 씌워져 앞이 안 보이는 시어머니에다, 궁색한 살림에도 나무그늘에만 앉아 쉬는 칠십 가까운 시아버지를 마주대하고 나니 딱 그 말이 생각나더랍니다.

 “잘되는 여자는 넘어져도 죽사발이고 안 되는 여자는 엎어져도 시궁창이라더니…” 라는.

 어쨌든 고생이 팔자려니 생각하며 살았지만 막 육이오 사변을 치르고 부상당한 팔을 목에 걸고 돌아온 남편을 보니 막막했다더군요. 해서 다시 뭍으로 나가 해녀 일을 하며 돈 벌어 오겠다고 집을 나왔답니다.

 그렇게 배를 타고 지긋지긋하게 가난한 시집에서 애써 탈출하여 부산 어느 바닷가 집에 여장을 풀었는데, 물질한지 사흘 만에 커다란 종을 당신 손으로 매달고 치는 꿈을 꾸고 나서 그렇게 보리떡이 먹고 싶었답니다. 함께 갔던 이모님이 “우리 둘이 물질 끝날 때까지 먹을 양식이라 신디 니 때문에 혼꺼번에 다 먹어부럼져 알앙 먹으라.”(우리 둘 올 한해 물질 마칠 때 까지 먹어야 할 양식인데 너 때문에 한꺼번에 먹어버린다. 알고나 먹어라.) 며 만들어 준 보리떡을 먹고 그게 입덧이란 걸 알았다더군요.

 그 뱃속 아이가 지금의 큰 오빠였고 그로인해 어머니는 다시 가난 속으로 걸어 들어오셨답니다.

 부상당한 몸이 회복되자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경찰공무원을 시작하신 아버지와 3남 2녀를 낳아 살면서도 어머니는 집에서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여름이면 야채밭을 밭떼기하는 장사를 했고 가을철엔 귤 장사를 하며 사셔야 했지요.

 그로인해 저와 네 살 터울이던 언니가 새벽마다 동네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일어나 아침밥을 지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학교가 파하기 무섭게 집에 돌아와 빨래며 청소를 하고 저녁밥을 지어야 했고 일곱 식구가 다 먹은 설거지를 하느라 친구들과 고무줄 할 시간도 없어서 가끔 속상해 운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새벽에 어머니께서 일어나셔서 부엌으로 간 날이면 여지없이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지요. 아홉 살 안팎의 어린 딸이 저녁설거지를 하고 찬장에 올려놓았는데 그리 철저하게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허나 어머니께선 그릇에 약간이라도 티끌이 붙어 있으면 그 그릇을 마당으로(당시엔 흙 마당이었지요)핑! 하고 내던지는 소리가 나곤 했습니다.

 저와 한 이불속에서 자던 언니가 그런 날이면 바르르 다리를 떨기도 했지요. 해서 언니는 지금도 설거지를 하며 지저분한 티끌을 잘 씻기 위해 저보다 두 배수의 시간을 허비하곤 합니다. 오죽했으면 결혼하고 처가 집으로 신행 오신 형부가 장모님을 향해 내뱉은 첫마디가 “장모님 이 사람 거북이고기 삶아 먹이고 시집보내셨습니까?”였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어머니도 나름대로 힘에 겨웠을 것입니다. 태몽에 얼마나 큰 종을 치셨는지 조상에도 없는 큰 키를 키워야하는 오빠를 비롯한 5남매들 때문에 매번 밥상위에 오르는 양푼 속 밥이 모자라 어머니는 아침부터 배를 곯아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밥 먹은 값을 치르느라 훗날 오빠와 언니는 월급봉투를 통째로 갖다드리느라 변변한 옷 한 벌 못 사 입고 지내야 했습니다. 타는 즉시 어머니께 갖다 바치느라 말입니다.

 왜냐하면 경찰공무원 봉급이 하도 박하던 시절이라 아버지께서는 궁리 끝에 일본 밀항선을 타게 되셨지요. 1960년대만 해도 일본에서 5년여만 고생하며 돈을 모으면 엔화를 원화로 환전할 때 생기는 차액만 갖고도 놀라운 富를 얻을 수 있던 시절이었으니 까요. 지금이야 수입 오렌지로 인해 귤 값이 하락 정도가 아니라 추락지경에 이르렀지만, 당시엔 귤나무 한그루가 대학나무라 할 만큼 (자식 한명 너끈히 대학학비 댈 만큼) 경제적 전망이 좋은 과수나무였습니다. 그래서 귤나무 과수원 3천 평을 일구기 위해 일본에 정착하신 큰 누님을 안식처 삼아 밀항선을 타게 되었지요. 헌데 어머니의 “넘어져도 시궁창 신세”는 여지없이 그런 꿈과 희망을 시궁창으로 변하게 했습니다. 아버지께선 매번 “이번엔 성공 하겠지”란 희망으로 밀항선을 탔지만 역시나 수취인 없이 반송되어오는 우편물처럼 목적지에 가보지도 못하고 일본 오무라 수용소를 거쳐 부산괴정수용소로 보내져 오셨지요.

 아버지는 40대 초반에 다시 시장좌판에서 한푼 두푼 모은 어머니의 쌈짓돈을 가지고 시도한 마지막 밀항에 성공하여 일본에서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헌데 추석이 가까워오자 간만에 외출하여 고향에 보낼 선물을 사려고 쇼핑하던 중에 일본경찰에 불심검문 당했답니다.

 일찍이 일제하에 형님 손에 이끌려 일본 대판으로 가서 초등학교과정을 마쳤던 아버지께선 해방 뒤, 혼란기를 피하기 위해  열다섯에 혼자 귀국선을 타고 돌아 오셨다고 합니다. 그런 만큼 일단 밀항에 성공하고 나서는 그곳 생활에 불편 없이 적응하며 살았는데 하필 중요한 사건에 연루된 범인의 인상착의와 흡사하다는 이유로 오사카경찰관에게 검문검색을 당했다고 하셨지요. 그로인해 어머니의 엎어져도 시궁창 신세는 고향에서든, 타국에서든, 여지없이 재연되곤 했답니다. 그로인해 귤 밭 3천 평의 꿈은 도리 없이 2천여 평으로 축소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시궁창속에서 건저올린 과수원 2천400평도 어머니에겐 지금의 여의도빌딩과 맞바꾸자고 해도 바꾸지 않았을 높고 위대한 정신적 문화재였음은 두말 할 나위가 아니었지요.

 허나 과수원만 만들어 놓으면 뭘 합니까 열매가 열릴 때 까지 거름, 비료, 농약 등등의 투자비용이 만만치 않은데 말입니다.

 그 누가 말했습니까? “두드려라 그리하면 열리리라.” 는 말.

 어머니는 서귀포 매일시장에 위치해 있는 집의 이점을 최대한 살렸습니다.

 커다란 고무 통을 수돗가 옆에 사다놓고 어물전 상인들에게 일렀습니다. 고기 손질하다 남는 부산물들을 다 갖다 버리라며. 그것으로 거름을 대신하며 과수원 수확이 나올 때 까지 6년여를 버텼던 것입니다.

 그 몇 년 동안, 통속에 모아놓은 고기부산물이 썩으면서 여름엔 지독한 악취에다 허연 구더기가 부엌문턱을 넘어 들어오는 공포를 제가 고3때까지 다 감당해야 했습니다.

 언니는 간호원으로 일하며 생활비를 댔고, 큰오빠는 공무원 월급봉투를 열어보지도 못하고 갖다 바쳐야 했으며, 둘째오빠는 버스운전을 하며 어머니의 시궁창 인생을 함께 탈출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요. 드디어 귤이 열리고 수확량이 제법 거? 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선 여전히 과수원 주변 빈 밭을 경작하며 콩과 밭벼, 팥과 보리 등의 작물을 심어 비오는 날까지 우의를 입고 일을 하셨고, 어둠이 내리면 과수원 창고에서 불을 켜고 앉아 따놓은 귤을 손질하기도 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어쩌나 나물무침을 할 때 참기름을 넣어 무치면 어머니는 목소리에 쇠심을 박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허어! 참기름은 쇠똥에 넣고 비벼도 맛좋은 거다. 어딜 함부로 넣고 먹는 거냐!” 고 말입니다. 허나 그러한 참기름을 1년에 5-6일정도, 마음껏 사용해도 되는 날이 있었으니 바로 제삿날과 추석 때였지요.

  그렇게 살아오시며 자식 넷을 다 결혼시키셨고 지금은 편안한 노후를 즐기고 계십니다. 헌데 당신이 어렵게 살아오신 만큼 자식들에게 그 삶을 강요하는 문제가 너무 도를 넘어설 때가 있어서 종종 저를 공포에 떨게 합니다.

 제가 결혼하고 막 신혼집 정리를 할 때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전화를 걸어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작은 올케언니에게 받은 축의금 반을 떼어서 도로 돌려주라는 겁니다. 사실 올케언니가 준 축의금은 당시의 경제적 가치로 생각할 때 그리 넘치는 정도의 금액이 아니었어요. 해서 제가 물었습니다.

 왜 돌려 줘야 하냐고 말입니다. 어머니의 답이 가관이었습니다. 시누이가 해 준 것 없이 올케언니의 축의금을 날름 받아 갔다는 겁니다. 하도 기가 막혀 작은 올케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지요. 지금 축의금 갖고 갈 테니 기다리라고. 헌데 작은 올케 언니는 “더 못해 줘서 미안하던 차인데 그걸 갖다 준다면 어떻게 받느냐” 며 기겁을 했습니다.

 아마도 친정어머님은 형편이 어려운 올케언니가 자신의 팔자를 닮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그러한 수단을 썼던 것 같았습니다.

 허나 막내딸인 제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정말 우리 친정어머니 맞아? 하는 서러움을 갖게 했습니다.

 그것뿐 만이 아닙니다. 첫아이를 출산하고 인파선 질환으로 약을 먹으며 장기간 푹 쉬어야 하는 막내딸에게 난데없이 전화를 걸어와 대낮에 퍼질러 누워 있으면 어떻게 살 것이냐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말씀 왈, 시장에 나가보니 백일도 안 된 아기를 업고나와 풀빵을 구워 파는 아주 부지런한 애기 엄마를 봤다는 게 호통을 치게 된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먼 기억까지 더듬어 올라가 보겠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어요. 어느 날 저녁 너무 배가 아파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도 어머니께선 제가 꾀병을 부린다며 밤새 방치를 했습니다. 사실 제가 아프면 엄살이 좀 심한 편이긴 했습니다.

 마침내 옆방에 세 들어 살던 간호원 언니가 새벽녘에야 와서 제 혓바닥을 살피며 배를 눌러 보곤 아무래도 맹장염 같다며 당시 식료품 가게를 하던 어머니께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동네 의원으로 가서 막 급성맹장염 진단을 받고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지요. 그래도 어머니는 오지 않았습니다. 의사와 간호사 들이 어찌된 일이냐고 법석을 떨 때쯤 어머니께서 병원에 등장을 했습니다.

 들어서자마자 어머니께선 “암만 생각해도 이제야 새로 생긴 이 병원에선 우리 딸 수술 못 맡길 것 같다. 요 아래 잘 아는 병원에 가서 다시 진찰받고 수술 하겠다” 는 말을 하며 저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지금 급성맹장염이어서 곧바로 수술을 하지 않으면 복막염으로 번질 위험이 높다고 했음에도, 어머니는 손을 저으며 저를 데리고 병원을 나섰지요.

 그때 병원 밖으로 걸어 나오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 어머니가 나를 큰 병원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택시를 붙잡고 오느라고 이렇게 늦으신 거야.”라고.

 그런데 밖으로 나와 보니 택시는커녕 가게에서 물건 실어 나를 때 쓰는 리어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날 걸어서 10분 거리인 또 다른 동네 의원으로 배를 움켜쥐고 가서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당시엔 지금처럼 의료보험제도가 없었던 시절이라 안면이 없는 병원, 그것도 새로운 설비를 투자해서 개업한 병원은 아무래도 수술비를 많이 청구할 확률이 높다고 판단하신 어머니께서 그러한 무리수룰 두신 것 같았습니다.

 허나 거기까지도 그런대로 괜찮은 기억이었지요. 제가 그 K병원으로 걸어 들어가던 시간에 벌써 환자한명이 막 수술을 끝내고 나오던 참이었습니다.

 아무리 아픈 와중에도 방금 수술을 끝낸 침대위에서 제가 수술을 받게 된다는 게 좀 껄끄러웠습니다.

 허나 어머니의 강압에 속수무책으로 들어 갈 수밖에 없었지요.

 그곳 원장님이신 강 아무개 씨는 국내 유명 S대 의대를 나오고도 월남전에 참가해 수도 없이 많은 부상병을 수술하고 치료한 경력이 있다는 소문이 나서 동네사람들 모두가 신뢰하는 의사선생님이셨습니다.

 어쨌든 그곳에서도 금성맹장염이라 빨리 수술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고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어찌 하는지 모르겠지만 1976년 당시 그 병원에서는 부분마취로만 맹장수술을 하던 때였어요. 해서 등을 구부린 자세에서 척추에다 바늘을 꽂고 마취주사를 놓더니 바로 누우라고 했습니다. 그 뒤 간호사들은 제 양팔을 침대 모서리에다 묶고, 모가지 바로 밑에다 야트막한 천을 커텐처럼 치곤 왼쪽 팔뚝에다 커다란 병 링거주사바늘을 꽂아 놓더군요. 그리고 제 아랫배에다 소독약이 묻은 솜으로 잘 닦아내더니 뻣뻣한 촉감이 느껴지는 천을 척척 올려놓고 나서 “원장님 수술준비 다 되었습니다.” 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이어 수술실로 성큼 들어온 그 원장님께서 수술실 구석에 앉아 지켜보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향해 그러더군요. “금방 끝납니다. 아무리 늦어도 30분이면 끝나니까 걱정 마십시오.” 라며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습니다.

 전 허리이하는 마취가 되었지만 가슴 위로는 말짱한 정신으로 수술을 받는다는 게 여간 기분이 묘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삼십 여분을 수술에 몰두하시던 원장님께서 어찌된 일인지 자신만만하던 처음과는 반대로 초조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 했습니다.

 급기야는 어머니가 의자에서 일어서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수술을 받던 저였는데 어머니의 그러한 목소리를 들으니 뭔가 불안하고 겁이나 몸을 바둥거렸습니다. 이미 그쯤에서 서서히 마취가 풀려가던 시점이라 더욱 공포감이 몰려들었지요.

 “간호사! 어머니는 내보내고 아버지만 남게 해!” 라는 원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잠시 수술하던 동작을 멈추더니 크게 숨을 고르는 모습이 제 눈에 다 잡혀왔습니다.

 그렇게 몇 초가 흐르더니 다시 제 뱃속 내용물을 더듬는 느낌이 전해졌지요. 저는 입술이 마르도록 신음소리를 내며 참아내야 했습니다.

 얼마 후 원장님은 커다란 마스크를 벗더니 손에 붉은색의 조그만 살점을 들고서 아버지를 향해 내보이며 “하~ 그놈의 맹장이 등 뒤쪽으로 돌아가 있을 줄이야.” 라며 만면에 미소를 띠었습니다.

 그렇게 수술을 끝내고 일반 병실로 옮겨질 즈음 전 이제 며칠만 참으면 고통이 마감 되는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허나 고통은 바야흐로 그때부터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제가 수술 받고 일주일쯤 입원해 있으려니 친구들이 하나둘 문병을 오기 시작 하더군요. 배에서 가스가 나오고 나니 서서히 식욕이 땅기면서 이것저것 먹고 싶을 즈음, 한 친구가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왔습니다. 유난히 먹고 싶던 차라 전 한꺼번에 두 개를 연거푸 먹었지요.

 헌데 막 두 번째 아이스크림을 반쯤 먹고 있으려니 제 오른쪽 아랫배, 정확히 말해서 수술자리 쪽에 뭔가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화들짝 놀란 저는 옷을 걷어 올리고 배를 살펴보았습니다. 정말 크림색의 뭔가가 배 밑으로 흘러내리고 있었지요.

 서둘러 당직 간호사언니를 불렀습니다. 전 그게 장이 제대로 아물지 않아서 아이스크림이 녹아 그곳으로 흘러내리는 줄만 알았던 겁니다.

 헌데 간호사언니를 따라 수술처치대위로 올라가 누우니 그게 수술부위가 곪아 터져 고름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때부터 저는 또다시 곪은 수술 자리를 쩍 쩍 벌리며 고름을 닦아 낸 뒤 소독된 깨끗한 거즈를 집어넣는 악몽과도 같은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살갗아래에서 새 살이 올라와 아물 때까지 말입니다.

 차라리 처음 갔던 그 깨끗한 병원에서 여유 있게 수술을 받았더라면 얼마나 행복했을까를 생각하노라니 퇴원할 무렵 제 몸무게는 162cm의키에 45kg이 되어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퇴원 뒤에 입어본 그 신축성이 좋다는 수영복이 제 몸에 달라붙지 못하고 헐렁하게 남아돌았겠습니까. 

 각설 하고, 퇴원 전 날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가게 일을 보다가 입원실로 찾아와 물수건으로 제 몸을 닦아주던 어머니께서 그렇게 중얼 거리더군요. “아이고 잘허카부댄허난 더 애만 먹게허염쩌 ”(아이고 수술을 잘 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더 고생만 시키는구나)

 철의 여인 이라 생각했던 제 친정어머니도 그때만큼은 별수 없는 평범한 어머니였습니다. 허나 전 그때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친정어머니란 말이 나오면 다리가 후둘 거리며 몸에 기운이 쫙 빠지는 증세를 느끼곤 하지요. 제게 “친정어머니”란 단어는 철보다 더 강하고 단단하며 무서운 존재라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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