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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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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손톱5


BY 달맞이꽃 2007-11-16

윤영은 눈을 꼭 감았다. 그날 밤, 윤영이 세훈과 몸을 섞었던 그날 밤의 꿈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윤영의 손톱을 먹은 쥐, 손톱을 먹고 점점 사람의 형체로 변하여가던, 그 사람의 형체가 서서히 윤영을 닮아가던 그 모습이 공포영화처럼 무섭게 지나갔다.

“지울 건가요?”

의사가 재차 물었다. 여의사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부드럽고 따뜻한 음성으로 그녀는 한 생명을 죽일 것인가를 묻고 있었다. 윤영은 그런 상황이 끔찍하게 싫었다. 신도 아닌 윤영이 어째서 생명을 죽일지 살릴지를 결정해야 한단 말인가. 세훈이 죽일 만큼 미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그러한 증오를 사기에 충분한 짓을 윤영에게 저질렀다. 그러나 윤영의 뱃속에 있는 아기는 단지 세훈의 피가 섞여 있을 뿐이었다. 세훈의 피를 가졌다는 것이 죄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윤영은 순간적으로 그럴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에도 보면 아담과 하와의 원죄가 피를 통하여 계속해서 내려오지 않던가.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죄가 될 수 있을 뿐 그 죄에 대해 윤영이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윤영은 생각했다. 적어도 윤영의 결정으로 인하여 아기의 생사가 운명 지어지는 그러한 절대적 우위에 서서 자신의 힘을 휘두르는 것은 너무나 불공평하고 너그럽지 못한 처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을 지켜내기엔 현실이 그리 녹록치 않았다. 미혼모가 된다는 것은 윤영으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찌되었든 윤영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혹시... 딸인가요?”

“네?”

“아기 말예요. 딸인가요?”

“아, 그건 규정상 알려드릴 수가   없기도 하고 아직 임신 초기라 확실   치가 않아요. 그리고.......”

여의사가 말을 흐렸다.

“혹 지우실 거면 모르시는 편이 더   낫기도 하구요.”

윤영은 씁쓸함을 삼켰다. 낙태는 규정상 가능한 일이고 아기의 성별을 알려주는 것은 규정상 안 된다는 말인가. 성별을 알려주는 것이 금지되는 이유가 성별에 따라 산모가 아기를 지우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있는 규정이라면 여의사는 너무나 모순된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마치 윤영이 당연히 아기를 지울 거라고 단정이라도 짓고 있는 듯한 그 여의사의 말에 보란 듯이 나을 거라고 되받아쳐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마 분명 딸일 거예요.”

윤영은 자신의 형상을 닮아가던 여자아이를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낳지 않을 거예요.”

“그럼, 수술은 언제.......”

“다음 주 초에 와서 할게요.”

윤영은 수술 날짜를 잡고 무거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다. 처음 병원을 들어설 때 그녀는 보란 듯이 세훈의 아기를 사라지게 만들 것이라 그리 단단히 마음을 먹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수술 날짜를 잡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녀는 전혀 후련하지 않았다. 세훈의 피도 흐르지만 자신의 피도 흐르는 아기였다. 아기에게 해를 가하는 것은 세훈에 대한 분풀이이기도 하지만 윤영 스스로에게 생채기를 내는 일이기도 했다. 아니, 오히려 세훈이야 남의 일이거니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윤영에게는 오래도록 그 영향이 남아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지혜로운 이가 말하기를 분을 내는 것은 자신에게도 이롭지 못하다 하였던 것일까. 

윤영은 밤이 깊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불이 꺼진 침실에 누워 있었다. 윤영의 두 손은 그녀의 날씬한 배 위에 얹어져 있었다. 만약 그녀가 아기를 지우지 않는다면 홀쭉한 윤영의 배는 날이 갈수록 커가는 아기의 크기에 따라 부풀어 올라 마침내는 흔히 비유하듯 남산만해질 것이다. 윤영은 그런 상상을 하며 낯설음을 느끼고 있었다. 배 위에 얹은 손을 통해 심장박동이 전해져 오는 듯 했다. 그것이 정말 심장박동인지 윤영의 상상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윤영은 왠지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기가 자신의 살아있음을 전해오는 것 같았다. 콩닥콩닥,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서 존재하노라고 열심히 끊임없이 윤영에게 말을 거는 듯 했다. 아직 아기가 자기 뱃속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윤영은 자신이 벌써 살인자가 되어버린 듯한 생각에 그날 밤도 잠을 설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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