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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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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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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손톱4


BY 달맞이꽃 2007-11-15

시간은 참으로 냉정한 것이었다. 천지가 뒤바뀌든, 한 여자가 농락을 당하고 버림을 받든, 철저하게 주어진 제 사명을 감당하며 일초, 일초 흘러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하기 때문에 인간은 아픈 일도, 증오스런 일도 흘러가는 시간의 강에 실어 함께 흘려보낼 수도, 잊을 수도 있는 것이리라. 마음을 가라앉히기까지 윤영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손님들의 손톱을 붙잡고 씨름을 해야 했고, 네일아트를 배우겠다는 수강생들까지 몰려드는 바람에 아침 10시부터 저녁 12시까지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밑이 빨갛도록 잘라낸 손톱들은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고 윤영은 그 위에 아름다운 아트들을 수놓았다. 물론 손톱을 볼 때마다 세훈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 분노가 오히려 일에 매진할 수 있는 지렛대가 되고 있었다. 몸이 고단하고 일이 많아 위에 탈이 났는지 소화가 되지 않는 것을 빼고는 윤영의 일상은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세훈의 일로 스트레스를 받아 그런 것이겠거니, 일이 고되어 그런 것이겠거니 하며 소화제로 버티던 윤영이 일이 범상치 않음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주가 더 지나고 나서였다. 매 달 있어야 할 월경도 없을뿐더러 음식 냄새만 맡으면 역한 기분이 들어 울렁증이 생기고 급기야는 극심한 구토 증세까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살은 자꾸만 빠져가고 병원을 찾아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윤영은 의사에게서 들을 말이 무서워 선뜻 그리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생긴 것은 아닐까, 아니, 분명히 아이가 생긴 것이리라. 윤영은 머릿속의 모든 사고가 정지해 버린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힘든 입덧으로 윤영은 잠시간 일을 쉬어야 했다. 아무런 증세도 없이 임신 초기를 보내는 사람도 있다던데 윤영은 그러하질 못했다. 어지럼증이 너무 심해 서 있기도 힘들 정도였고 구토가 심할 때는 위액에 피까지 섞여서 올라왔다. 일을 쉬면서 윤영은 얼굴 보기가 죽기보다 더 싫은 세훈을 다시  한번 찾아야 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임신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윤영은 생각했다.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쓰러질 듯한 몸을 이끌고 힘들게 찾아간 세훈이 윤영에게 던진 말을 들은 후였다.

“이런 바보 같은! 어쩌란 말야! 나는 왜 찾아왔어? 이제까지 한 번도 이런 일로 날 찾아온 여자는 없었어! 제길, 그 나이가 되어 가지고 날짜도 하나 못 맞추고 말야. 돌아가! 난 모르는 일이야.”

일말의 기대감도 없이 찾아간 세훈이었지만 윤영은 그 말을 듣고는 도저히 그냥 돌아설 수가 없었다. 힘이 없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었지만 세훈의 따귀를 때릴 정도의 기력은 남아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유난히 심한 구토가 올라와 윤영은 몇 번을 나올 것도 없는 위가 뒤집어지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하도 깨물어 피가 맺힌 입술을 윤영은 또 다시 깨물었다. 

‘죽이려는 거야. 그 자식의 씨가 나를 죽이려는 거야. 이미 한 번 죽여 놓고 또 다시 확인사살을 하려는 거야.’

윤영은 이러다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다고 윤영은 생각했다.

‘두고 봐. 내가 죽일 거야. 그 자식의 씨 따위 내가 먼저 죽일 거야.’

그렇게 윤영은 산부인과를 찾았다. 여의사가 진료를 하는 병원을 찾은 윤영은 진료 전부터 결혼여부를 묻는 간호사의 말에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알아서 눈치를 챈 간호사가 기다리라는 말을 할 때까지 진회색의 병원 바닥만 노려볼 뿐이었다. 윤영의 이름이 불리고 진료실을 들어서자 윤영은 가슴이 심하게 뛰어서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겨우 진찰대에 누운 윤영의 배를 초음파로 보던 여의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낳을 건가요?”

윤영은 왠지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기에게 무슨 죄가 있나.’

떼어 버리려고 병원을 찾았는데 자신의 대답에 정말 아기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생각하니 윤영은 갑자기 너무 무거운 짐을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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