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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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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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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꿈꾸는 여자3


BY 달맞이꽃 2007-10-12

 

이미 양수가 터진 상태인데다 상황이 긴박하다고 느꼈는지 담당의사는 제왕절개 수술을 준비했다. 몸에 오는 고통으로 인해 다시 정신을 수습한 나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야 헐레벌떡 병원으로 달려온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젖은 머리칼과 와이셔츠 단추가 두어 개쯤 풀어진 채로 내 곁에 다가와 괜찮은지 물어보는 그의 흐트러진 모습은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아내의 안위를 걱정하여 정신없이 달려온 애정이 가득한 남편의 모습으로 비춰지기에 충분했다. 수술대에 눕혀지면서 나는 그의 양심과 뻔뻔한 얼굴도 함께 수술대에 올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몸의 고통은 나의 정신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내 마음을 더욱 흔들어 놓았다. 마취가스를 들이마시면서 나는 최대한 깊게 호흡했다. 가능한 한 가장 오랫동안 아픈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현실에서 달아나 버린 것은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의 행위가 만들어 낸 우리들의 아이였다.

두 번째로 꿈을 꾸던 날 나는 그 꿈속의 상대가 혹시 나의 첫사랑은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정말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끝난 풋사과의 새콤한 맛이 나던 그 사랑, 다정다감하던 그라면 꿈속의 그 남자처럼 나를 살뜰히 품어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아니라면 여고 시절 짝사랑하던 수줍음이 많으시던 젊은 교생 선생님일지도 모른다. 지나가는 여학생들의 인사에도 얼굴을 붉히시며 어쩔 줄을 몰라 하시는 성격이었지만 그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내 꿈속의 그 남자처럼 정열적이고 뜨거운 사랑을 할 거라며 계집애들끼리 모여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었다. 만약 그 선생님도 아니라면 어쩌면 그 친구일지도 모른다. 여대생 시절 매일 내 자취방 앞에서 내가 좋아하던 캔 커피를 들고 나를 기다리던 조금은 귀찮고 조금은 기특했던 그 친구 말이다.

아, 지금 생각하니 나는 왜 지금의 남편을 택했을까. 인기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 많은 남자들을 마다하고 이렇게 나를 배신할 몹쓸 남자를 선택했던 것일까. 저주받아 마땅할 나의 자존심은 결혼까지도 싸움을 걸어 쟁취한 사랑을 선택했다. 콧대 높은 척 애인도 사귀지 않고 도도함을 콘셉으로 내세운 채 싱글로 지내던 내게 친구의 소개로 만난 그는 조금은 무심한 태도로 나를 대했다. 다른 남자들과 다른 그의 태도에 나는 기분이 상했다. 저 남자를 기필코 무너뜨려 보리라 그렇게 결심했었다. 우린 참 독특한 커플이었다. 정말이지 우리만큼 대화가 없는 커플이 또 있을까 싶었다. 만난 지 한달 내내 그는 항상 나를 앞에 두고 먼 산 보듯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고 나는 노려보듯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 남자는 분명 나를 싫어하는 것이리라 나는 결론을 내렸고 이럴 거면 그냥 만나지 말자고 내 쪽에서 먼저 통보를 했다. 그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내가 이별을 통보한 그 다음 날 저녁, 그는 술이 만취가 되어서 내 자취방 앞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나를 붙잡아 세워놓고 나에게는 한마디 말도 못하게 한 채 일장연설을 했다.

“마음을 열어주길 기다렸어. 좋아는 하는데 당신이 너무 꼿꼿해 보여서 내 마음을 섣불리 표현하는 게 겁이 났어. 겁쟁이라고 해도 할 수 없어. 연애라는 거 원래 서툰 놈이고 사랑이라는 감정은 내게는 너무 낯선 거니까. 잘난 척 뻣뻣하게 하고 다녀도 나는 당신 앞에서는 언제나 사랑이 떠나갈까 봐 가슴 졸이는 그런 못난 남자였다구.”

그의 말이 끝났을 때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안아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 때 전리품을 얻은 기쁨의 미소를 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싸움을 걸어서 결국 내가 이긴 거야. 이긴 자의 여유로 나는 그를 품에 안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상처 입은 짐승을 보듬듯이 너그럽고 느릿하게.

사랑의 감정이 우선 된 것이 아닌 이기적인 탐욕의 마음으로 취한 사랑이라 그 사랑이 오래가지 못한 걸까. 그래서 내가 이렇게 아픈 걸까. 결혼 후 남편은 내가 이별을 통보했던 그 때처럼 다시 한 번 돌변했다. 나에게 안타깝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 모습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먼 산 보듯 하는 그 답답함만이 남아있었다.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을 즈음에 이르면 한 번씩 술에 취해 와서는 그 때와 같이 나는 한마디도 못하게 한 채 다시 일장연설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애정표현이 서툰 남자다, 그러니 내가 좀 무뚝뚝해도 참아 달라, 표현을 못해서 그렇지 마음만큼은 너를 열정적으로 사랑한다. 처음 몇 번은 서운한 마음도 다 녹아내릴 만큼 그런 월례 행사가 그래도 감동적이었다. 그 감동이 계속 옅어져 증오와 분노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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