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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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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꿈꾸는 여자1


BY 달맞이꽃 2007-10-12

 

우리는 연인사이였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앉는 바닷가를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거닐기도 하고 서로에게 안겨 긴 입맞춤을 하기도 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황홀경에 빠져있었고 가슴은 온통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파도는 잔잔했으며 갈매기는 평화롭게 날고 있었다. 최면을 거는 듯한  그의 부드러운 시선이 나를 감싸면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모든 시간이 그와 나를 중심으로 멈춰버린 듯 했다. 주위의 풍경들은 말 그대로 열정적인 남녀 주인공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드라마의 그림 같은 배경이 되어주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그윽한 시선이 뛰고 있는 심장 소리의 요란함만큼이나 휘몰아치듯 내 영혼을 빨아들였다.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가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쩌면 우울증에 걸린 것일지도 모른다. 눈을 떠서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것에 대한 권태감, 아니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생각의 흐름은 아닐 것이다. 새로운 날을 맞이할 때마다 그 계수만큼 나는 축축하고 묵직한 상실을 차곡차곡 마음 언저리에 쌓아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던가. 특별히 나쁠 것도, 그렇다고 딱히 좋을 것도 없는 평범한 일상을 그저 그런대로 불만 없이 잘 엮어가고 있던 나였다. 그랬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일상의 모든 것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무언의 존재가 나를 붙잡고 밍밍한 현실에서 벗어나도록 조심스레 이끌었다. 나를 붙잡은 그 알 수 없는 손을 뿌리치지 못한 채 나는 그저 이끄는 대로 비현실의 강물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뒤틀림의 시작은 어느 날의 꿈에서 비롯되었다. 꿈속에서 나는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 어떤 이와 정사를 나누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분명히 그가 남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남편이라면 그리 살뜰하게 나를 품어주지는 못했을 터였다. 이 사람은 누굴까. 나를 달콤한 쾌락의 절정으로 치닫게 만드는 그의 존재가 궁금했지만 그것을 신경 쓸 여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은 흡사 내가 제왕절개 수술을 하려고 산부인과 분만실 수술대에 누워 마취가스를 들이마실 때의 느낌 같은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수술이 끝나고 마취에서 깨어날 즈음, 아련하게 나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깨어질 듯 말 듯 잠의 나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의 그 아득함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두려움 같은 것을 감지하면서도 고통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잊고 달콤한 기분에 취해 있다가 그 순간이 지나 꿈을 깰 때면 나는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날 때 느끼는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내게 현실이라는 것은 부드럽고 따스한 순간들을 빼앗아 가는 몹쓸 존재였다.

처음 꿈을 꾼 날, 나는 하루 종일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남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질 못했던 것이다. 사실 꾸어지는 꿈이야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것이니 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허나 내 마음이 그 꿈을 깨기 싫어했다는 사실이 나를 죄책감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꿈속의 그가 남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그는 분명 남편이 아니었다.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최근 몇 달 동안 나는 남편과 한 번도 부부관계를 갖질 못했다. 그 전이라고 해서 자주 부부관계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첫 아이를 사산아로 낳은 후 나는 지독한 허무와 싸워야했다. 자궁에 남아 있는 채로 지워지지 않는 아이의 온기. 심장 소리. 힘차게 엄마의 배를 차 대던 그 발길질. 그 씩씩하던 아이가 왜 죽은 채로 내 뱃속에서 나와야 했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마취에서 깨어나질 말아야 했었다. 아득하게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그 침잠 속에 내 영혼을 맡겨야 했었다. 눈 좀 떠보라며 나의 뺨을 때려대는 간호사의 목소리에 지친 눈꺼풀을 열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 했으면 그 가여운 핏덩이가 싸늘하게 죽어 있는 현실을 대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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