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물여섯에 결혼 1주일만에 찾아온 동지에 팥죽 안 끓여먹는다고
호되게 혼나며 전화기 말도 끝나기전에 탁 내려 놓으시던
시어머니 앞에서 벌벌 떨고 있던 맏며늘.
동서는 나이 서른에 애가져 시집오면서도
못난 막내아들 구제해준 신이 내려주신 지차 며늘.
아들 둘이 있어도
그 둘이 너무 차이가 나도 못쓰는것 같다.
못한 아들의 부인은 계속 이유없이 잘난 아들의 부인을 시샘하게 되는것 같고,
잘난 아들의 부인은 끊임없이 자기가 자기 자식 울려가며 남의 손에 맡겨가며
힘들여 번것들을 못난 자식의 부인에게 퍼줘야 착하단 소리 듣게 되는것이고....
그나마 형이 동생보다 잘난것은 다행이라 여겼다.
그래서 결혼할때 우리가 신혼여행에 한이 많아
시동생에게 백만원 신혼여행비로 보태주고, 부모님께 따로 큰돈을 보태드렸다.
동생이니까 하면서
임신해서 시집온 동서
시댁 집들이를 내가 해주겠노라 오지랖 넓게 나서서는
수원서 구미까지 5시간을 차를 몰고 가서는
대구서 부모님 태워서 장부터 몽땅 내가 보고
저녁 외식비 몇십만원 우리가 내고,
저녁 내내 아침 준비 미리 해서 랩 씌워서 냉장고 넣고
국 끓여놓고, 쌀 씻어 앉히는 동안
동서는 자기 부엌에서 왔다 갔다만 해도 나는 그때만 해도 좋았다.
혼자사는 시누이 서른 몇평 아파트 경매 건 잡아서 몇년을 이자로 고생하더니
입주한다고 있는 돈 없는 돈 끓어다 애쓰는거 안타까워
삼백만원을 해주고, 최고가 중고 장롱, 책상, 침대, 식탁까지 일절을 해넣어주었을때도
그때까지도 나는 좋았다. 뿌듯하고 보람있었다.
아마 내심 우리 맏며느리 잘 봤다는 칭찬이 그때까지만 해도 듣고 싶었나 보다.
그 시누이 시댁 집들이 할때도 내가 음식을 바리바리 해서 갔었다.
그때도 어른들은 끄덕끄덕 칭찬이 아닌 당연한 고개 끄덕임만이 있을 뿐이었다.
냉장고, 세탁기, 김치냉장고 , 텔레비젼, 청소기, 압력보온 밥솥, 전화기
모두 총각적 남편, 그리고 결혼 후 과외한 내 돈으로 해드린 가전제품들이다.
이거 말고도 가전제품이 있나?
아!!
회사에서 나온 우리것보다 더 좋은 전자레인지
레인지대 , 최고급 수저세트, 도자기 그릇 10인조세트 까지...
이러고도 다달이 돈을 안 내려보내는 우리는 할일 하나도 안하는 맏며늘.
"나는 자식한테 돈 받아 쓸 복은 없는 모양이다.
우리 옆가게 할매는 나이가 70인데 젤 먼저 가게 문 열고, 젤 늦게 문 닫거든.
그 할매 첫 아들이 좀 못하고, 둘째가 의사라.
그 둘째 며느리 안 볼라캤다카이.
그런데, 한달에 삼십만원씩 보낸다고 약속받고 봤다카이.
명절에는 백만원씩 딱딱 부치라 칸다 캐.
그 돈 모아갖고 큰아들 횟집 안 차려줬나."
명절에 중도금 붓느라 빚에 쪼들리던 내가
20만원을 어쩔줄 모르며 내밀때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 날 내게 그리 말씀하시던 같은 그 날
남편이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니
"아이구 야이 야!!
너거 무슨 돈이 있다고 20만원이나 내놓노.
너거 아파트 돈 들어간다고 그래 쪼들리는데
엄마가 하나도 못 보태 줘가 미안테이. "
"엄마, 걱정하지 마라. 내 알아서 다 한다."
허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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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다!!!
여자는 늙어도 여우다 하더니......
그런데
그 시어머니가
지차며늘한테는 못난아들의 아내한테는 절절 절절 절절 매신다.
지금도 잊지 못한다.
둘째 연년생 딸을 낳을때
18개월 된 7대장손인 아들 그리 좋아하시던 그 장손 봐줄 사람이 없어
울고 불고 절절 맬때 (친정어머니 돌아가시기 한달전이라서)
제왕절개라 내가 소변줄 뽑을때까지 이 삼일 내옆에도 사람이 있어야하고,
큰 아이 맡길때가 없으니 딱 이삼일만 애 좀 봐주십사 좀 올라와주십사
남편이 부탁을 했는데
일언지하 " 가게 문 못닫는다. "
하시더란다.
어쩔 수 없이 추석연휴에 맞추어 2주를 당겨서 낳기로 하고
남편이 내 병원에 큰 아이는 시누이가 추석연휴에 우리집에서 봐주기로 하고
2주 1일 앞당겨 둘째를 꺼냈다.
2.64 킬로그램
개구리 같았다.
누구보다 내 가슴이 더 아팠다.
큰 아이땐 친정엄마도 옆에 계셔주셨고, 아이도 3, 46으로 크게 태어났는데
딸 아인 아무도 없이 너무나 여린 모습으로 손도 못 댈 만큼 야리 야리한 모습으로
눈만 얼굴의 반인 채로 태어났었다.
젖을 물리러 이틀만에 겨우 겨우 부축을 받고 갔다.
젖꼭지가 입에 들어가질 않았다.
세상에 그렇게 작은 입이 있는 줄은 내 처음 알았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어머님이 집으로 오셨다.
소고기국 끓여놓으신다고(미역국 먹는 산모때문에 당신 아들 먹을거 없으시다면서)
오셔서는 개구리만큼 작은 아이를 보시곤 걱정하는 남편을 향해
"애는 적게 낳아서 크게 키우라고 했다.
그런 소리 하는거 아이다."
하시기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줄 알았다.
웬일이신가 하여...
아니나 다를까
내려가시자 마자 때르릉 벨이 울려 남편이 전화받고는 절절 매기에
"왜?" 전화끊는 남편에게 물으니
"엄마가 걱정이 태산이다.
애가 뱃속에서 곯아서 나온게 한눈에 표시난다고.
니가 얼마나 안 먹었으면 애가 그렇게 작냐고.
완전 뱃속에서 곯아서 나왔단다."
한다.
그 말을 곧이 전하는 나를 질책하듯 전하는 남편도 미웠다.
애는 나혼자 만들었나.
8개월짜리 저지레가 하늘을 찌르는 아들을 데리고
게다가 친정어머니 오늘 내일 하시는데 가보지도 못하는 우울증에
임신해서 입덧하는데 누구한사람 챙겨주는 이도 없이
혼자 18층 아파트에 들어앉아 쓰레기 버리러 나가는것도 힘들던 그때
내가 어떻게 내 입에 맞는걸로 골고루 챙겨먹으면서
장봐다가 해먹으면서 그러고 살았겠는가.
그때가 한창이었는데. 아파트 중도금 붓느라고 말이다.
지금처럼 이것저것 맛난걸로 시켜먹을 상황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냥 가슴에 콱!!!!!! 하고 박혀버렸지 눈물로 흘러버려지지가 않았다.
그랬던 시어머니
동서가 2. 46으로 열달을 다 채우고도 몇일을 넘겨 낳았는데도
동서의 딸은 우리 딸보다 0.2나 적게 태어났는데도
가게문 닫고 병원 앞에서 한참을 기다려서 맞이한 그 손녀는
일언반구 적다는 둥 곯아서 나왔다는 둥 한마디 없이
산후조리까지 그 바쁜 와중에 다 해주셨다.
이 집에서만 잘난 큰아들과 사는 벌을
나는 도대체 언제 까지 받아야 하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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