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14세 미만 아동의 SNS 계정 보유 금지 법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271

김 선생님께


BY 둘리나라 2007-09-15

 

                                    제목: 김 선생님께


 가을볕의 살랑거림에 지나간 사랑의 추억을 다시 꺼내어 보며 가슴 설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시린 겨울이 스산함으로 다가와 옷깃을 여미게 하고 있습니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소식 못 전한 지가 제법 되었습니다. 저는 염려 덕분에 지금은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아이들에게도 엄마의 몫을 잘해 나가며 안정을 찾고 있습니다. 이대로만 평온하게 지낼 수 있다면 적어도 죽음과 어깨동무하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과 알게 된 10년 전 여름이 생각납니다. 어느 단체의 모임에서 경기도로 하루 코스의 나들이를 가던 차 안이었습니다. 마이크를 잡고 열띤 강의를 하셨지요. 에어컨을 틀어 놓은 차였는데도 얼마나 열정적으로 강의를 하셨는지, 땀이 흘러내려 옷이 다 젖고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진 땀방울들이 차 바닥에 고였습니다. 그때 전 비가 내린 다음날 새벽의 산의 느낌을 선생님에게서 받았습니다. 축축하게 젖은 땅 위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안개가 자욱한 오솔길을 걸어가면 신비하면서도 약간은 무서움에 소름이 돋는 묘한 기분이 생기는데 선생님의 모습이 꼭 그랬습니다. 저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으니까요. 열변을 토하는 말마다 묻어 나오는 거부하기 힘든 카리스마(?)에 매료되었다고 하면 믿어지십니까?

 그 뒤로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얼굴을 뵙고 인사를 해 온 시간이 8년째가 되어 가니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속에서 맺어진  인연의 끈이 참 튼튼했었나 봅니다. 아마도 전생에 무척이나 가까웠던 관계가 아니었나 생각하며 혼자 웃어보았습니다.

 선생님, 작년 봄부터 많이 의지했고, 위로와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우연히 안부 전화를 하셨던 날, 전 남편과 이혼을 결심하고 지칠 대로 지쳐 어둠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냥 하는 인사로 잘 지내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왜 그렇게 따스하게 들리는지 그만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지요. 부모님의 반대로 10년을 친정에도 못 가서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도 모르고, 나는 고아 아닌 고아로 지내왔는데 이혼이라니! 어디다 말도 못하고, 가슴에는 피고름이 맺혀 뼈마디가 쓰리고 아팠습니다. 고생만 가져다준 남자의 배신. 10년을 술과 노름과 여자로 고통을 주었고, 무능력한 가장이어서 제대로 된 월급봉투 한번 받아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결국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의지할 곳 없는 철저한 외톨이로 세상에 무참하게 버려졌다는 생각에 억울하고 분해서 치를 떨었습니다.

 그는 컴퓨터 채팅으로 만난 여자와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아이들만 내 몫으로 남겨 주었죠. 병들어 버린 몸과 빚더미는 선물로 주고, 그것도 모자라 방세 밀린 사글셋방과 텅 빈 쌀통까지 덤으로 주었습니다. 너무 억울하고 기가 막혀 울음도 막혀 버렸지요.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어루만지며 잘 먹지도 못하는 죄 없는 술만 목구멍에 쏟아 부었습니다. 죽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조용히 죽어 없어지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았습니다. 몸도, 마음도 병들어 치유하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사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으니까요.

 선생님, 저를 찾아오셔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창문을 열고 커튼을 걷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나이 김수정. 이정도로 쓰러지면 네가 아니다. 세상이 다 무너져 내려도 넌 살아남을 사람이다. 넌 연약한 꽃이 아니라 잡초 같은 여자다. 짓밟을수록 더 뿌리를 뻗고 생명력을 내뿜은 그런 사람이다. 어서 일어나.”

 창으로 들어온 햇살 알갱이들이 막혀있던 혈관에 온기를 주었습니다. 전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햇살이 그렇게 따스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눈물이 났나 봅니다.

 선생님은 제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상과 부딪히는 법,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법, 아이들에게 강한 엄마가 되는 법을 비롯한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온실 속에서 자라 왔던 화초를 척박한 땅에도 자라는 잡초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어떤 말로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런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인생의 값진 것은 사람과의 관계인 듯합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랑하고, 아파하고, 용서하고, 또 이해하며 살아야 하니까 말입니다. 선생님이 보여 주신 깊은 진리는 아마도 물처럼 흘러가라는 것이었나 봅니다. 인생의 소용돌이도, 웅덩이도 따지고 보면 잔잔히 흐르는 물의 일부분에 불과하니 결국에는 더 큰 물에서 만나지는 이치가 맞나 봅니다.

 아무리 먼저 가려 다투고 욕심을 내도 시냇물은 강물에서, 강물은 바다에서 만나지는 것이 삶의 순리인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나만 불행하고, 억울하고, 비참하다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빠져나올 수 없는 올가미를 만들어 몸과 마음을 묶었으니 말입니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그저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시행착오인 것을 이제야 깨달았으니 무엇이든 겪어 봐야 정답을 찾는 모양입니다. 척박한 땅에도 뿌리를 내려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제가 되어 보려 합니다.

 믿고 지켜보시는 선생님을 비롯한 다른 분들께도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전 지금 배터리를 충전하듯 심장에 강한 희망을 몇 십 년이 지나도 소모가 안 되도록 충전시키고 있습니다. 삶의 편에 서서 이야기 하고 세상을 보고, 꿈의 편에 서서 일하고 생활하고, 사랑의 편에 서서 사람들을 만나고 아이들과 함께 살 것입니다. 자신 있으니 걱정 마세요.

 선생님, 용기도 생기고, 힘도 생기고, 살아야겠다는 강한 욕심도 생깁니다. 덕분에 새로운 눈으로 삶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은혜를 갚는 길은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 사는 길이라 생각하며 이렇게나마 제 마음을 전해봅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빕니다. 다시 만날 때는 활짝 웃는 모습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줄입니다.

     

              겨울에 들어선 하늘언저리에 서서

                             김수정 드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