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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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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BY 둘리나라 2007-09-15

 

                                            제목: 향기


  먼지가 쌓인 이불을 마당에 털고 있는데 수다스러운 아줌마의 목소리처럼 전화기가 울렸다. 뛰어가 받았더니 포항에 사는 큰 언니의 전화였다. 수화기를 타고 언니가 걱정하는 모습 전해졌다.

 얼마 전 언니는 풍을 맞았다. 새벽에 화장실 가다 쓰러져 두 달을 병원에 있다가 퇴원한 지금도 왼쪽 팔과 다리는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못한다. 그런 언니가 스무 살이나 차이가 나는 막내 동생 걱정에 언제나 먼저 전화를 한다. 미안함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통화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코끝이 찡한 여운이 남아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그러니까 내가 다섯 살 때 우리 가족은 바닷가 마을에서 살았다. 아침이면 하얀 파도 소리와 갈매기의 날갯짓에 눈을 떴고, 멀리서 만선의 뱃고동이 ‘부웅’하고 울리면 저녁노을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고깃배는 붉은 빛에 싸여 어린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비릿한 바다 냄새에 취해 바라보던 밤하늘에는 반짝이는 비늘들이 춤을 추었고, 작은 계집아이의 꿈도 조금씩 자라났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가는 고향 풍경은 언젠가는 꼭 돌아가야지 하는, 누군가가 그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언니는 한 달에 한 번씩 집에 들렀다. 돈을 번다고 도시로 나가 집안에 맏딸 노릇을 하고 있던 터였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바다를 뛰어다니던 나도 언니가 오는 날은 아침부터 눈이 빠져라 기다렸고, 참다못해 버스가 서는 마을 어귀 나무 아래를 한달음에 달려 나가곤 했었다.

 나무 아래를 서성이던 새까맣게 그을린 계집아이. 그 아이에게 언니는 엄마와도 같았다. 나이 많은 엄마는 언제나 사는 데 바빴다. 바다 사람들이 그렇듯 새벽부터 밤까지 쉴 새 없는 일 덕분(?)에 하루 세끼 밥 챙겨 주는 것도 힘이 들었다. 엄마 대신 언니의 젖을 만지며 그 품에서 자란 내게 언니는 엄마였고, 진한 그리움이었다.

 멀리 버스에서 언니가 내리면 왈칵 솟아오르는 눈물이 뺨 위로 흘렀고, 뛰어가 품에 파고들어 코를 비볐다. 그러면 언니는 나를 꼭 안으며 “우리 수정이 많이 컸네”하며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코를 뚫고 들어오는 언니의 체취는 알싸하면서도 입에 침이 고이는 그런 향기였다. 난 나중에 머리가 큰 다음에야 그 향기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커피’ 냄새였다.

 언니의 손에는 시골에서는 맛보지 못하는 초콜릿이며 사탕이며 과자들이 들려 있었고, 부모님 내복과 양말도 있었다. 뽀얀 분칠을 한 언니의 얼굴은 너무도 고왔고, 빨간 입술을 곱게 다문 모습은 한 송이 꽃 같았다.

 “언니야, 나도 언니처럼 예뻐지고 싶다.”

 사실이었다. 어린 눈에도 너무 예뻤다. 언니는 나에게 예쁜 드레스를 입히고, 빨간색 구두를 신겨주고, 입술에는 립스틱을 발라주었다. 난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러 뛰어나갔지만 얼마 못가서 엉엉 울며 돌아와야 했다. 샘이 난 친구들이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아이고, 이 시골에 드레스는 무슨 드레스. 애나 어른이나 똑같다, 똑같아.”

 엄마의 성난 목소리는 담장 위로 흘렀고, 언니와 나는 약속이나 한 듯 바닷가로 도망을 쳤다. 파도는 바위에 철썩이며 흰 가루를 뿌려 대고, 태양 빛에 모래가 황금색 들판을 만드는 바닷가를 언니의 등에 업혀 끝에서 끝까지 걸어 다녔다. 어스름이 내려앉는 바다위로 등대의 불빛이 한 폭의 풍경화를 만들면,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내 유년의 추억은 가슴 시린 겨울의 눈발처럼 바다에 녹아들었고, 시간을 뛰어넘어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언니가 집안의 생계를 위해 다방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언제나 풍겨나던 그 향기를 이해하게도 되었다. 바다가 그리웠는지 언니는 바다로 시집을 갔고, 나 역시도 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가슴속에 바다를 숨겨두고 살았다.

 가끔씩은 커피를 타려다가 커피 통을 열어 코를 깊숙이 대고는 크게 향기를 맡아보기도 한다. 그러면 커피색 바다가 예쁜 언니를 파도에 태워 내게 데려다 준다. 지금은 세월의 흐름 속에 이마에는 주름이 지고 몸도 불편하지만, 언제나 꽃 같았던 그 모습을 기억하고 싶다.

 수화기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창밖을 보았다. 언제부터 내렸는지 하얀 눈발이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 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면 언니와 함께 고향 바다를 다녀오고 싶다. 이제는 내가 언니를 등에 업고 저녁노을 속을 걷고 싶다.

 언니! 언니의 사랑으로 내 어린 날은 너무나 소중하고 행복했노라고 말하며 따스한 커피 향에 취하고 싶다. 그 시절 커피 향에 취한 바다는 추억이라는 예쁜 아이가 되어 언제나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지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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