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연필과 동화책
학원에서 돌아온 큰아이가 책상 앞에 앉아 큰소리로 동화책을 읽고 있다. 글씨를 배워가면서 책 읽는데 취미를 붙여 이제는 어려운 받침의 글자도 척척 읽어내며 자신만의 상상의 세계에서 즐겁게 꿈을 꾸는걸 보니 너무 대견하다.
요즘은 워낙 책들이 많아 읽고만 싶으면 골라서 입맛대로 읽을 수 있지만, 내 어릴 적에는 그렇지 못했다. 바닷가 마을에서 터울 많은 언니오빠들 밑의 막내로 태어난 나에게는 조개껍질과 모래가 유일한 장난감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래로 밥과 반찬을 하고, 모래로 성을 쌓고, 모래위에 그림을 그렸다. 이미 다 커버린 형제들은 학교 공부에 바빠 놀아줄 수 없었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계신 대가족 집안일을 도맡아 하시던 엄마에게 응석을 부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 처음으로 책에 관심이 생긴 건 아버지 때문이었다. 기억속의 아버지는 언제나 책상 앞에서 두꺼운 책을 읽고 계셨다.
“아이고, 그놈의 책. 읽으면 밥이 나와, 돈이 나와. 속 터져서.”
엄마는 아버지의 등위로 그런 말들을 쏟아 부었고, 그럴 때면 아버지는 슬그머니 책을 들고 바닷가로 나가셨다. 바위에 걸터앉아 책을 읽는 아버지의 머리위로 갈매기가 날았고, 멀리서는 만선의 배가 힘차게 노래하고, 햇빛을 받은 바다는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어린 눈에 그 모습은 너무나 멋지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책을 읽으면 저렇게 멋지게 되는 구나.’ 그때 내 꿈은 책 읽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몇 년 뒤 우리 가족은 도시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어색한 도시 생활에 조금씩 적응을 해 나갔다. 짝꿍은 약간 심술궂은 아이었는데 항상 동화책을 가져와서 읽었다.
“우리 엄마가 읽고 오라고 했다. 동화책 우리 집에 많다.”
그때까지 동화책을 본 적이 없던 내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드레스를 입은 신데렐라, 예쁜 눈의 백설 공주 그리고 엄지공주까지……. 너무 보고 싶었지만 엄마에게 사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엄마에게 책은 천하에 쓸모없는 물건(?)이며 읽어 보았자 생활능력 없는 아버지밖에 될 수 없는 한숨 나는 것이었다. 삶에 지쳐 하루하루 턱걸이하듯 넘어가는 시간들이 짜증스럽고, 무능력한 가장의 짐을 대신 져야 하는 현실 앞에 고단한 몸을 눕기가 무섭게 코를 골아야 했던 당신에게 떼를 쓸 수는 없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동화책 한 권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연필 한 자루를 주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형형색색의 그림이 그려진 책들은 눈을 즐겁게 해 주었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작은 꿈을 키우게 해 주었다. 신데렐라의 왕자님은 이상형이 되었고, 신드바드는 모험의 설렘을 주었으며, 콩쥐팥쥐는 선과 악을 가르쳐 주었다. 없어져 가는 연필의 자리만큼 꿈의 자리는 자랐고, 머릿속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옷을 갈아입으며 주인공들이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 달콤함은 얼마 가지 않아 끝이 나고 말았다. 엄마의 레이더를 어찌 벗어날 수 있었으랴. 정말 안 죽을 만큼 맞았던 것 같다.
“이놈의 가스내. 공부하라고 사 준 연필 다 어쩌고…….”
“엄마, 잘못했어요.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엉엉…….”
“내가 어떻게 사 준 건데. 다 어쨌노. 연필 다 어쨌노.”
“엉엉……동화책이랑 바꿨어요……엉엉.”
그 아까운 것을 개도 안 물어 갈 책하고 바꾸었다니 얼마나 화가 나셨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손금이 없어지도록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서야 겨우 엄마의 화가 가라앉았으니 말이다.
그날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는 내게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다가와 꼭 안아 주셨다. 등을 토닥거려 주시며 따스하게 말씀 하셨다.
“우리 수정이가 책이 많이 읽고 싶은가 보구나.”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 온기는 지금도 가슴속에 남아서 가끔씩 그리움과 함께 온몸을 흐른다.
아버지는 며칠 뒤 나를 서점에 데리고 가셨다. 처음 가 보는 서점! 커다랗게 쌓여서 천장까지 뻗어 있는 책들은 놀랍고 신기함 그 자체였다. 손수 책을 골라 주시며 열심히 읽어서 나중에 멋진 글을 쓰는 사람이 되라 하셨다. 내 품에는 다섯 권의 동화책이 보물처럼 안겨 있었다.
어쩌면 당신의 소망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루도 안 빼고 50년을 넘게 일기를 쓰셨고, 환갑이 넘으신 나이에도 책을 놓지 않으시던 분이었다. 수첩을 들고 다니며 영어며 한자를 손수 적어 공부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제는 추억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이름을 불러야만 앞으로 뛰어나와 그 시절의 이야기들을 풀어 놓는다.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그립고 또 소중하다. 연필을 손에 쥐고 공책에 또박또박 글을 쓰는 아이를 보며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는 건 왜 일까!
요즘은 컴퓨터와 게임기의 발달로 동화책은 한쪽에 밀려 책꽂이의 장식품으로 변해 버렸고, 신데렐라며 신드바드는 스타크래프트와 만화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의 가슴에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건 기계가 아니라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적어 내려간 동화책 한 권인 것 같다. 아직은 사람의 감정이 살아 느낌을 전해주는 동화책에 손이 간다. 아이에게도 항상 이야기한다.
“혜빈아. 책은 네가 평소에 해 보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생각할 수 있게 하고, 많은 추억을 준단다. 지금은 엄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른이 되면 알 수 있을 거야.”
아버지를 통해서 알게 된 행복한 책 읽기의 습관은 오래도록 지속 될 것이다. 많은 양의 글들을 읽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읽으며 내 아버지처럼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 아주 멋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