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인연
아이가 말을 안 듣는다며 회초리를 들었다. 평소 같으면 말로 타일러도 될 일을 울컥하는 감정이 앞서 심하게 때리고 말았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아이가 서러움에 지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다. 베개가 촉촉할 정도로 운 것을 보니 많이 아프고 슬펐던 모양이다. 눈가에 매달린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종아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자국을 보니 가슴이 오그라들며 목이 아파 왔다. 불쌍한 녀석. 사랑만 해 줘도 모자란 시간인 것을. 미안함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온몸을 덮쳤다. 조금만 참았으면 될 일을 엄마라는 사람이 어쩌자고 모질게도……. 속이 상해 밖으로 나왔다.
무작정 걸었다. 가을바람이 산을 넘어 가슴속으로 들어와 쓸쓸하게 불었다. 뼛속까지 훑고 가는 이 허전함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발자국마다 피멍이 들어 쌓이는 허허로움에 흐려지는 하늘이 야속하기만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둠이 내려앉은 버스 정류장에 혼자 서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 주위에는 침묵의 그림자만이 친구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거리에는 숨 막히는 적막감이 밀물로 몰려왔고, 멀리서 등대의 불빛을 안은 버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를 보았던 날. 하늘과 바다를 구별할 수 없어 내 눈의 바보스러움을 탓하며 걷다가 보았던 등대의 불빛은 하늘의 별이 지상으로 내려 온 듯했었다. 누군가를 이끌어 주는 소중한 사랑 하나 가슴에 문신되어 자리를 잡고, 등대는 외로운 바다를 지키고 있었다. 그 불빛을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내 앞에 선 유리창이 많이 달린 놈(?)의 뱃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바다로 데려다 줄 것만 같은 착각에 동행을 찾아보았다. 아니, 그런데 아무도 없다. 기사 아저씨와 나.
버스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가라앉았고, 늦은 밤에 여자 혼자 웬일이냐는 궁금함을 가득 담은 아저씨의 눈길만이 가끔 얼굴을 간지럽게 했다. 눈이 마주치는 게 이리도 불편할 수 있을까. 창밖의 세상으로 눈을 돌려 버렸다.
버스는 어둠의 바다를 헤치며 다음 정류장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스쳐 가는 풍경들은 현실을 가져다주었다. 가을의 때가 잔뜩 묻은 가로수에는 말라 가는 추억들이 낙엽 되어 있었고, 길바닥을 뒹구는 마음들은 외롭다며 비명을 질러 댔다. 그리고 이 버스는 바다로 가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시커먼 연기로 무장한 바퀴 달린 난폭자였다.
저 낙엽들은 어떤 인연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가을을 죽음으로 맞이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에 물음표를 그리다 문득 이 운전기사와 나는 전생의 어떤 인연으로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둘만이 있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오게 되었다. 순간, 얼마 전 들었던 이야기 하나가 기억 속을 비집고 들어와 반갑다며 인사를 했다. 너무나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여인의 가슴 아픈 이야기.
남편과 아이와 행복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살았던 여인이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 둘째는 친정에서 낳고 싶어 해산 일에 맞춰 친정으로 가족들과 가는 도중에 산에서 날이 저물어 버렸다. 집도 없고 몸을 피할 곳도 마땅치 않아 산 속에서 서로를 의지한 채 하룻밤을 보냈는데, 깨어나 보니 뱀이 그만 남편을 물어 죽여 버린 것이었다. 졸지에 남편을 잃은 여인은 가슴이 미어지도록 슬펐지만, 아이들 때문에 친정으로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간밤에 비가 많이 내려 강물이 불어나 도저히 강을 아이와 함께 건널 수가 없었다. 상상해 보라. 불어난 강물 앞에 자식의 손을 잡고 만삭이 된 몸으로 서 있는 여인을.
여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이 줄어들어 강을 건너야 친정에 갈 수 있는데, 굽이치는 강물은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줄어들 생각을 안 하니 그 마음이 오죽 했을까. 물이 빠지길 하염없이 기다리다 결국 진통이 시작되어 혼자 둘째를 강가에서 낳고 말았다. 아이의 탄생을 기뻐하고 반겨 주는 이 하나 없는 서러운 출산이었다. 시간이 흘러 강물이 차츰 줄어들자 큰아이에게 나무 밑에서 기다리라 말하고, 작은아이를 품에 안고 강을 건넜다. 작은아이를 풀밭에 눕혀 놓고 큰아이를 데리러 다시 강을 건너 반쯤 왔는데 아뿔사! 늑대가 큰아이를 물어 가 버린 것이다. 여인은 기가 막혀 뒤를 돌아보니 작은아이를 커다란 독벌레가 물고 있는 것이 보였다. 행복이 슬픔으로 바뀌는 데는 얼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도 이보다 아프지는 않으리라. 실성한 듯 말을 잃은 여인은 넋이 빠져 앉아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친정으로 향했다.
길에서 친정 동네 아저씨를 만났는데 간밤에 불이 나서 친정 식구가 몽땅 불에 타서 죽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운명은 어찌 이리도 가혹하고 칼날 같은지……. 살아 있는 것이 죽음보다 힘들다는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 여인은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인은 결국 절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고, 수많은 고행과 수도 끝에 자신의 전생을 보게 되었다. 씻을 수 없는 악연을 맺었던 무섭고도 괴로운 전생을!
여인은 전생에 사대부 집의 마님이었는데, 아들을 낳지 못하자 집안에서 둘째 부인을 맞았다. 둘째 부인은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고, 모든 관심은 그쪽으로 쏠렸다. 질투로 화가 난 여인은 식구들 몰래 아이의 머리에 바늘을 꼽아 죽여 버렸던 것이다.
둘째 부인이 여인을 의심해 울부짖으며 묻자 “내가 당신 아들을 죽였다면,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내 남편은 뱀에게 물려 죽고 큰아이는 늑대에게, 둘째 아이는 벌레에게 물려 죽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집 식구들은 불에 타서 전부 죽을 것이다!”라고 큰소리를 쳤다. 이 여인이 후생에 이렇게 엄청나고 무서운 결과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텐데.
모든 것을 깨닫게 된 여인의 몸은 하루에 한 번씩 머리에서 발끝까지 바늘이 뚫고 지나가는 고통을 안고 평생을 속죄하며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자신이 행한 업보를 그대로 거두어들이면서 말이다. 악연도 길연도 내가 만든 모습임을, 지금의 모습 또한 전생의 죄와 복의 결과임을 이야기를 들으며 깊이 생각해 보았었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윤회의 삶이 있다면 악연보다는 좋은 인연이 많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나를 다시 돌아보았었다. 지금 나는 왜 이 이야기가 떠오른 걸까. 스쳐 지나가는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전생에 큰 인연이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건 인연의 고리를 엮는 작업의 연속일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는 세상과의 인연을 맺고, 부모와의 인연을 엮는다. 결혼으로 남편과 아이들의 고리를, 주위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의 고리를 엮고 살다 결국은 죽음과의 고리를 엮는다. 크고 작은 고리들로 맺어진 삶이라는 인연 속에 좋은 것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태어나면서 하늘이 내게 필연의 고리들을 주셨다면, 솔직히 좋은 인연만 맺으며 살고 싶다. 어차피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우리이기에 남에게 등을 맞대고 기대야 한다. 이왕이면 좋은 고리들로.
여인이 후생의 인연을 알았더라면 조금은 더 나은 삶을 살며 사랑하는 마음을 열었을 것이다. 나 역시 내가 엮어 가는 인연들이 인생을 마감할 때 웃으며 고개를 끄떡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다.
버스는 다음 정류장에 입을 벌렸고, 몇 명의 학생들이 재잘거리며 탔다. 이 아이들과 나는 또 어떤 만남이었을까. 머릿속에 물음표 하나 던져 주고 버스에서 내렸다. 한 정거장이라는 짧은 거리에 이토록 많은 생각들이 스쳐갈 수 있는지에 놀라며 집으로 걸었다. 삶의 인연인 딸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머리 위에 둥글게 둥지를 튼 만월이 숨어 버린 가을바람과 술래잡기를 하며 장난을 걸어 왔다. 바람이 자꾸만 등 뒤에 숨어서 커다란 고리를 만들고 있었다. 가을이라는 인연의 고리들을. 이 가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을 때문에 아파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행복해할까. 또 가을을 떠올리며 얼마나 많은 인연의 이야기들을 풀어낼까, 털어 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