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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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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를 널며


BY 둘리나라 2007-09-12

 

                             제목: 빨래를 널며


 올여름은 유난히도 비손님이 자주 온다. 수분에 젖은 하루하루를 창밖으로 내다보며 운치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걸 보니 어쩔 수 없는 아줌마 인가 보다. 아스팔트를 거세게 때리는 빗방울들이 이제는 좀 지쳤으면 좋겠다고 가벼운 한숨으로 맑은 하늘을 그려보기를 몇 며칠.

 드디어 파란하늘이 구름 친구를 데리고 여행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 왔다. 물기 먹은 나무들이 햇살에 드라이를 하고, 습기 찬 거리에도 생기가 돌고 있다. 인간의 마음이 참으로 간사한 것이 덥다고 짜증을 낼 때는 시원한 소나기가 그렇게도 반가웠는데, 지루한 장마 끝에는 햇볕이 오래된 벗을 만난 듯 기쁘다.

 집안에 주인행세를 하던 습기들을 쫓아내는 대대적인 청소를 하고, 밀렸던 빨래를 돌리려 세탁기 앞에 섰다. 세탁호스를 꼽고 전원을 켜고 빨래와 세제를 넣으니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져 내렸다. 때가 묻은 빨래위에 하얀 거품이 일며, 시동을 거는 차처럼 윙윙 소리를 내며 세탁통이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깨끗해지기 위한 전초전인 셈이다. 이제 세탁이 되면 적당한 헹굼과 탈수를 거쳐 때가 빠진 옷들이 빨랫줄에 걸릴 것이다.

 기분까지 상쾌하게 만들어줄 빨래를 널며, 또 집게로 날아가지 않게 단단히 작업을 하고 나는 만족한 표정으로 다른 일을 시작하겠지. 그러면 햇살과 바람이 뽀송뽀송하게 옷들을 말려 저녁이면 거둬들일 수 있을 테지. 다시 저마다의 소임으로 돌아가 바지로, 치마로, 티셔츠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빨래 통으로 귀환을 할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세상 풍파에 찌들어 때가 생길 때 깨끗하게 만들어 주는 기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흰색 옷과 색깔 옷을 분류하듯 상처 난 마음, 고통스러운 마음들을 분류해서 각기 맞는 방법으로 적절히 세탁할 수 있다면 사는 게 조금은 편해 질 텐데…….

 올여름은 유난히 견디기 힘들고 심장이 바늘에 찔린 듯 따가웠었다. 운명처럼 다가온 헤어짐을 온몸으로 겪고 나니 많이 약해지고 눈물샘도 터져 버렸다. 결혼 10년을 단 몇 십 초의 판결로 남이 되어 남편과 악수를 하며 서로의 행복을 빌던 날도 비가 내렸다. 남편과 남편의 여자는 우산을 함께 쓰고 걸어갔고, 나는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제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님을 확인하며 씁쓸한 웃음을 뒤로한 채 사랑은 끝이 났다. 서로에게 짐이 되는 불편함보다는 차라리 마음 편히 살자며, 조용히 의식처럼 우리는 이별을 택했다.

 가난했던 결혼생활. 남편이 나에게 남겨 준 건 아무것도 없었고, 오히려 갚아야 할 빚들이 고민으로 남겨졌다. 더 이상은 아파하고 상처받지 말자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 보아도 속이 상하고, 앞으로 두 아이와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 알 수 없는 어둠의 저편에서 유혹하는 절망의 손짓을 뿌리치기가 힘이 들어 내리는 빗속을 하염없이 걸어도 보았다. 그러나 겉만 젖을 뿐 가슴속 갈증은 가시지 않았고 목이 말랐다.

 정리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비가 내리니 더 깊은 배신감에 나 자신이 초라해졌다. 물먹은 빨래처럼 쳐지고, 무거운 몸과 지루한 장맛비에 약해질 대로 약해진 영혼의 집은 고열의 몸살을 동반한 여름감기로 앓아누워 모든 것을 무기력하게 했다.

 삶의 커다란 부분을 정리하려니 때가 낀 빨래처럼 선뜻 마음이 가지 않고 주저하게 되었다.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기에 비가 갠 맑은 오늘, 마음속에 커다란 세탁기 한 대를 설치했다. 지치고 고통 받았던 때를 씻겨 줄 세탁기를 말이다.

 희망이라는 세제를 넣고 용기라는 물을 트니 새로움이라는 거품이 생겼다. 지금부터 힘차게 때를 없애는 작업이 시작 될 것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려면 세탁이 끝난 마음을 빨랫줄에 걸어 적당한 사랑과 믿음을 주어 말려야 할 테지.

 한참을 세탁기 안의 빨래를 보며 맘을 세탁했더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옷들이 마당 가운데 널렸다. 더위의 끝이 오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앞서가는 것인지 코끝에 가을 타는 냄새가 났다. 하나씩 하나씩 깨끗하게 빨린 빨래를 널며 슬픔의 바지도, 아픔의 치마도, 눈물의 티셔츠도 뽀송뽀송해지길 빌었다. 더 이상은 때가 안 묻기를……. 장마가 지나간 자리에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다고 하지만,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어서인지 그리 덥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마음마다 지혜의 세탁기가 있어 어려운 세상살이의 고비 때 마다 힘겨움과 어려움을 던져 넣으면, 깨끗하게 세탁해 고운 빛깔로 향기품은 꿈과 희망이 되어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름다운 하루를 위해 지치고 피곤한 정신도 깨끗하게 세탁해주는 세탁소가 있다면 대박일 텐데.

 별의 별 상상을 하며 혼자 웃음을 짓는 여유가 생긴걸 보니 시간은 인생을 가르쳐주는 스승이 맞나보다. 만약 그때 포기하고 좌절했다면 지금의 내 모습은 때가 꼬질꼬질하고 냄새가 풀풀 나는 빨래와 같았을 것이다. 집게를 하나씩 매단 채 하늘거리며 흔들리고 있는, 내 몸속에서 빠져나온 분신들아. 열심히 살자! 따가운 햇살이 빨래를 지나 내 눈 속에 들어왔는지 자꾸만 눈이 따가워져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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