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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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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된 형님에게


BY 둘리나라 2007-09-11

 

                        제목: 친구가 된 형님에게


 형님. 울산을 떠난 지 이틀째가 되었네요. 여기는 서울 근처인데 날씨가 잔뜩 울상을 짓더니 기어이 비를 쏟아내고 있어요. 내리는 빗소리를 가슴으로 들으며 이렇게 몇 자 적어요. 어떤 말부터 써내려갈지 막막해 잠시 숨을 돌리고 그냥 형님 얼굴을 떠올려 보았어요.

 아이들을 맡기고 혼자 나선 여행길. 결혼생활 10년을 정리하는 여행이고, 또 다른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 힘겨움도 동반자가 되어 버렸네요. 스쳐 지나는 곳마다 여름의 옷으로 갈아입느라 계절은 바쁜데 나만 쓸쓸한 겨울에 머물러 있더라고요. 그동안 뭘 하며 살아온 건지…….

 형님. 하늘이 너무나 우울했던 그날의 찻집이 떠오르네요. 남편이라는 사람이 낯선 여자와 걸어 내려와 앉으며 내게 그녀를 사랑한다고 큰소리 쳤던 그곳 말이에요. 정말 어떤 단어로 그때의 심정을 쓸 수 있을까요. 지금도 뒤통수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없고 혼란스럽기만 하네요. 두 사람의 당당함에 오히려 내가 죄인이 된 듯 했고, 인연의 고리가 일순간에 터져 버려 주워 담을 수 없다는 현실에 실없는 웃음만 허공에 흩어졌었죠. 신문에서나 보아 왔던 채팅 때문에 이혼한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내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해 봤으니까요.

 10년을 같이 산 아내보다 단 세 번 만난 사람을 더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 그보다 세 살이 많은 그녀는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을 나왔고, 남편 역시도 아이는 안 데려간다며 남의 말하듯 쉽게 말했어요.

머릿속에는 수십만 가지의 원망과 미움이 스쳐갔지만, 끝내 뱉은 한 마디는 둘이 행복하게 잘살기를 바란다였죠.

 그때 형님이 나타났었지요. 놀라던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네요.

내 손을 꼭 잡고 “둘이 사랑한다니 같이 사세요. 하지만 당신 올케로 인정 못합니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한 얘가 올케고, 또 영원히 올케는 얘뿐입니다. 당신은 우리 가족이 아닙니다.”하셨죠.

“못난 동생이 끝까지 널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며 “네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데……”하며 굵은 눈물방울을 손등에 떨어뜨리던 모습이 잊혀 지지가 않아요. 너무나 갑자기 다가온 일이라 경황도 없고 대책도 없이 남편은 그 여자와 떠나 버렸죠. 부모도, 형제도, 자식도 필요 없다면서요. 어이가 없더라고요. 그게 진정한 사랑인지, 한순간에 모든 걸 버릴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전 그의 결정을 담담히 받아 들였어요.

 하지만 형님,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10년의 결혼 생활이 남겨준 건 고생과 병든 몸과 빚뿐이란 생각에 분하기도 했어요. 지금까지도 반대하는 친정엄마 생각이 나니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 살아온 시간 속에 남아있는 흔적들을 지우고만 싶었어요.

 남편이 그녀와 떠난 지 일주일이 흐르고 나니 이제는 현실이 조금 눈앞에 보여요. 맨바닥에서 아이들과 살아야 하는 게 지금의 모습이고, 또 열심히 앞을 봐야만 흔들리지 않고 세상에 설 수 있는 최선이라 느껴졌어요. 나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용기를 내야 하잖아요. 그래서 떠난 여행인데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확실한 결론을 내리고 마음을 정리하고 내려가야 하는데 …….쉬울 것 같지는 않지만 노력하고 있어요.

 형님,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요? 약간은 쌀쌀맞고 빈틈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솔직히 긴장도 되고 다가서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친한 사이가 되었잖아요. 친구로, 언니로, 인생의 선배로, 시누이로 언제나 곁에 있어 주었는데 이제는 어떤 사이로 만나야 할지 걱정이 되네요. 하지만 남편 때문에 서먹해진다면 남편을 잃는 것보다 더 마음이 아플 것 같아요.

 형님. 어느 시인의 시처럼 떠나가서 알게 되는 그리움이 있다면 인생에서 한 번쯤은 떠나는 것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비울 때를 알고 비우는 현명함과 채울 때를 알고 채우는 지혜로움을 배워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인가 봐요. 난 남편이란 존재를 가슴 속에서 비우고, 형님을 친구로 채우려고 해요. 편한 친구로 우리 다시 만나요. 어색한 웃음 말고 기쁜 웃음으로요.

 여행을 마치고 내려가면 아이들과 앞만 보며 달릴 거예요. 가끔은 슬퍼서 울 때도 있겠지만, 그건 살아가는 과정의 일부분일 뿐 희망과 꿈을 향해 달리는 건 쉬지 않을 겁니다. 나와 인연이 없었던 사람이라고 남편을 기억하며 원망도, 배신의 상처도 내리는 빗속에 씻을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옆에서 지켜봐 주세요. 그리고 힘이 되는 친구로 남아 주세요.

 형님, 사랑해요! 항상 건강하고, 내려가서 그동안 밀린 이야기 나눠요. 이 비가 그치면, 봄을 마감하는 비가 그치면 내 가슴에도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기를 가만히, 아주 가만히 빌고 있어요.

안녕 .빗소리가 듣기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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