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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의 얼굴


BY 박 소영 2007-03-12

체념의 얼굴
박소영
'언제 또 올래' 자주 다니던 봉사자가 손가락 열 개를 펴보이니 낙심을 한다. 먹고 살려니 바빠서 그라제 고맙고 미안하다.'
할머니 표정이 너무 애절해 보여서 며칠 있다가 온다고 하지 왜 그리 길게 잡느냐고 물으니 일주일 이상은 감을 못 잡지만 이삼 일은 기억할 수 있어 지난번에 약속날짜보다 늦게 갔더니 기다림에 지쳐 병이 난 후로는 무조건 열흘로 잡는다는 함께 간 교우에 설명이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20년 전 이웃 할머니 올해로 백삼 세, 우연한 기회에 성당봉사자와 연결돼 오늘 할머니가 거주하는 골목 안 지하 단칸방을 찾았을 땐 나도 몰라보고 우리 집 안부도 묻지 않고 자꾸만 누구냐고만 묻는다.

백삼 세라는 연륜답지 않게 곱고도 깨끗한 피부와 깔끔한 성품, 인자하신 모습은 20세기 초 흔하지 않은 지식인 다운 품위를 갖추신 할머니시지만 지금은 곁에 아무도 없는 생활보호 대상자로 사신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목욕을 시켜드리려던 본래의 목적은 접고 앉아서 이야기하고 놀았다. 봉사자끼리 이야기가 아니라 할머니를 쳐다보고 같이 이야기도 하고 할머니 손을 잡고 두드려 보기도 하고 성가도 부르면 할머니는 금방 밝은 웃음을 지으시면서 여러 딸 속에 앉은 여느 가정과 다름없는 엄마의 환한 얼굴이다.

한참 앉았다가 우리 셋의 발을 차례로 보잔다. 찬찬히 그리고 유심히 차례로 발을 훑어보시더니 너희 셋은 다 발이 예뻐서 괜찮다고 하시면서 당신 발을 내보인다. 엄지발가락 옆이 휘어져 박복하고 영감 명줄까지 이어 쓸데없이 명만 길어 이렇게 오래 살아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말년 신세를 휘어진 발 탓으로 여기신다.

법조인의 딸, 법조인의 아내, 경기여고 출신에 잡지사기자 화려했던 지난 세월은 할머니 기억 속에 추억일 뿐, 현실은 가혹했다. 팔십이 다된 딸들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도 편모슬하지만 물려받은 재산과 어머니의 능력으로 해방 직후 여학교까지 졸업한 엘리트 여성들이었다.

공부 잘하고 똑똑했던 딸들은 남자 보는 눈은 어두웠다. 둘 다 유부남을 좋아해 한 여자의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차지한 자리가 할머니 눈에가시였다. 할머니께서 사생결단으로 말린 맏딸의
임신과, 또 다른 남자의 선택 시끄럽고도 어려운 가정생활은 할머니와 모녀관계를 멀게했다. 어머니의 희망이었던 둘째 딸, 엄마의 기대한 만큼 착실했다. 좋은 직장을 얻어 모녀가 행복하게 살던 때를 할머니는 가끔 이야기해주신다.
청천벽력 같은 할머니의 절망, 둘째 딸을 좋아한 직장상사는 이혼을 하고 결혼을 강요했다. 혼기를 넘긴 딸의 첫사랑은 그 어떠한 할머니의 노력도 허사였다. 딸과 재혼 후 사위는 직장 안에 눈총과 당시 사회의 분위기는 직장생활을 계속 할 수 없었다. 직장을 잃고 사업에 손댔지만 실패만 거듭했다. 딸 혼자 벌어 시어머니를 모시고 전처자식과 너무 힘들게 사는 둘째 딸이 가엽고도 미웠다. 둘째 딸은 정년 때까지는 얼마의 생활비도 보냈지만 할머니의 재산을 몽땅 떨이하고 딸을 고생시키는 둘째 사위가 용서할 수 없다면서 죽는 날까지 찾아오는 것을 거부하고 용서가 안된다고 버릇처럼 세월을 씹으신다.

어머니의 한을 죄스러워 하던 둘째 딸은 함께 살기를 거부하시고 혼자 외로이 사시는 어머니와 시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부담감은 자기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몸은 망가져 갔다. 자궁암 수술한 후 방사선 후유증으로 오랜 고생 끝에 저 세상으로 갔다. 딸의 죽음을 모르는 할머니는 몇 년째 찾아보지 않는 딸이 괘씸하고 야속하기만 하다.
이웃에 혼자 살 때 나에게 자주 하소연하시던 할머니의 한평생, 긴 시련은 모든 일들을 체념하게 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 하셨다. 그런 연유인지 지금 할머니 모습은 평온하고 밝다.

"따르릉" 정리되지 않은 방구석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앳된 여자의 목소리다. 복지사라면서 봉사자냐고 묻는다 이삼 일에 한 번씩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서 전화도 하고 가끔 들린단다.

다리도 주물러 드리고 돌아앉지도 못할 좁은 방을 대강 정리했다. 어두컴컴한 방안엔 밤낮으로 불을 켜놓는단다. 식사도구, 요강단지가 방안에 함께 있다. 따뜻한 방. 혼자 생활할 만큼 보조는 나오니 아무것도 사오지 말고 자주 오란다. 이불이 허술해서 다음 올 때는 이불을 가지고 오려니 봉사자가 말린다. 자선 단체서 가지고 온 이불과 내의를 포장도 뜯지 않고 그대로 서랍 위에 얹어 놓았다 하면서 이불 뭉치를 가리킨다. 죽은 후 새것은 헐벗은 사람이 가지고 가도 되니 그런 사람 주려고 머지않을 여생, 있는 그대로 입고 덮고 하면 된다는 게 할머니의 고운 마음 가짐이시다.
초점 없는 동공은 또 허공을 헤맨다. 그러다가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신다.
"자식 소용없다. 너희가 내 딸이다. 내 죽으면 올래? 셋이서 약속이나 한 듯 합창했다. 할머니 돌아가시면 우리가 와서 울고 음식도 장만하고 산에도 따라가고 할게요". 금방 반색을 하신다. 수의상자를 가리키면서 죽을 준비가 저 상자 안에 다 있다. 힘대로 해 뒀으니 너희가 알아서 해라.

"내가 너희한테 해 줄 거는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죽어서 하늘나라 가면 너희 영혼을 위해 기도해 줄께. 이름과 성당본명을 적으란다." 체념하고 살아오신 긴긴 세월, 셋의 볼을 차례로 어루만지면서 착한 내 딸들 눈시울이 벌게지시더니 이내 당신의 한을 감추신다.

온 지 세 시간이 넘어 저녁때가 됐네! 라고 하니 할머니는 벌써 그렇게 됐나 갈 준비를 하는 줄 알고는 다음 올 때는 빈손으로 와서 놀다 가거라 부담되면 못 오기 마련이다. 내가 사가지고 간 과자와 과일을 도로 가지고 가란다. 혈육이 곁에 없는 할머니의 외로움은 공포이다. 어쩜 죽는다는 사실보다 더 두려운 외로움, 붙잡으면 다시 오지 않을까 봐 얼른 가서 가장들 밥해 주란다. 가까운 날에 와서 날 목욕시켜다오. 약속을 받고 싶으신 할머니, 뻔쩍 펴는 열 손가락을 체념하듯 쳐다보신다. 발길은 무겁기만 하다.

뒤통수에서 할머니께서 세상을 향해 닫는 지하방 문닫는 소리가 들린다. 또 누군가가 와서 할머니의 자식이 되어 닫힌 문을 열어 드려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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